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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정조 평가, 사료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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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과도 손잡은 '타협의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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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독재체제에서 집권… 주자학 유일사상에서 벗어나 사상적 다원화 추구
실용과학에 관심 많아… 이가환과 대화 나누며 “지구는 둥글다” 주장도
일체의 잡기 외면한 채 수양에 힘써… 비단옷 대신 무명옷 입고 백성 걱정
정조의 초상 / photo 조선일보 DB
그러나 이런 관찬사료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부분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정조실록’은 정조 사후 정치적 반대파인 노론벽파가 집권하면서 작성되었다는 문제점이 있고, ‘일성록’은 일부 내용이 의도적으로 잘려나갔다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정치적 반대파에 의한 의도적 왜곡이다. 따라서 이런 사료들을 이용할 때는 작성자의 정치적 의도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하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나 정약용의 저술 같은 개인 기록들로 보충해야 한다.
먼저 정조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도세자 문제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쪽에서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이란 ‘팔자흉언(八字凶言·여덟 자로 된 흉언)’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래서 영조는 세손을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10세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씻어주었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 당일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신 것이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0일)라며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스스로 천명했다. 그러나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벽파를 적대시하는 대신 포용에 나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영조의 유훈 때문이었다. 영조는 죽기 직전 세손 정조에게 “임오년의 일(사도세자가 죽은 사건)은 의리상 충분히 옳은 것 같더라도 이는 곧 나를 모함하는 것으로서, 단지 나에게만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너에게도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1일)라면서 사도세자 문제를 제기하는 자는 “왕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조가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 노론벽파는 선왕의 유훈을 어긴 것으로 쿠데타의 명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는 사도세자를 살해한 노론벽파 전체를 적으로 돌릴 경우 정상적인 정국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사도세자 사건을 없던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정조는 노론벽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즉위에 성공했는데,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과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 동일한 정치세력이었다.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나 혜경궁 홍씨의 숙부 홍인한, 대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 문제를 가지고 이들을 처벌하기보다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혐의로 처벌했다. 그래서 소기의 정치적 효과를 거두면서도 선왕 영조의 유훈은 위배하지 않는 운영의 묘를 살린 것이다.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타협하는 것은 초인적 인내가 필요했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병석에 누웠을 때 “두통이 많이 있을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가슴의 화기는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얼굴을 맞대고 정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구선복(具善復)이다. 그는 영조 때부터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른바 숙장(宿將)으로서 사도세자 사건에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를 계속 훈련대장, 병조판서 등 군의 중요 보직에 임명하다가 재위 10년(1786년)에야 다른 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처형한 후 이렇게 말했다.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가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정조실록 16년 윤4월 27일)
정조는 재위 13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소를 수원 화성을 옮겨 현륭원으로 삼고 자주 능행(陵幸)했는데 현륭원에 참배할 때면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조실록 18년 1월 20일)고 할 정도로 부친을 애도했다. 그러나 정조는 부친을 위한 최고의 복수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조실록’이나 ‘일성록’ 등의 관찬사료에는 보이지 않지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정조가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칠순이 되는 갑자년(1804년)에 왕위를 순조에게 물려주고 상왕 자격으로 화성으로 가서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려 했다고 전한다.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조를 주제로 한 저술·드라마가 잇따르고 있다.
사진은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photo 조선일보 DB
“원래의 소원을 이루어 마마(혜경궁)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평생에 사도세자께 자손으로 이루지 못한 통한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내가 선왕의 하교를 받아 이 일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원통하나 이것 또한 의리요, 왕세자가 나의 부탁을 받아 내 소원을 이루어내어 내가 못한 일을 내 대신 행하는 것이 또한 의리입니다.”(한중록)
정조 자신은 선왕의 유훈을 받았으므로 사도세자 추숭사업에 나설 수 없지만 아들 순조가 할아버지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는 것은 영조의 유훈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또한 정조는 ‘지금 신하들이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안 하는 것도 의리이고, 훗날 신하들이 추숭사업을 하는 것도 의리’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추숭을 반대하는 세력의 입장도 감안한 것으로서 바로 이 부분이 정조와 집권 노론이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정조는 이런 타협을 통해 조성된 왕권으로 미래를 지향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정조의 진면목이다.
정조 즉위 당시 조정은 노론 일당독재 체제였고, 노론의 정치이념이던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였다. 정조는 일당체제를 다당제로 바꾸고, 주자학 유일사상을 다원적 사상 체제로 바꾸어야 조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조가 다당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호대법(互對法)이었다. 호대법은 이조판서가 노론이면 참판은 소론, 참의는 남인을 임명해 상호 견제하게 하는 인사방식이었다. 그러자 노론은 남인들을 서학(西學·천주교)을 신봉하는 신서파(信西派)로 몰아 제거하려 했다. 서학이 사학(邪學)이라며 국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노론의 논리를 뛰어넘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정학(正學·성리학)이 밝아져서 사학(邪學)이 종식되면 상도(常道)를 벗어난 이런 책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燕)나라, 초(楚)나라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그러니 근원을 찾아 근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바로 급선무에 속한다.”(정조실록 12년 8월 6일)
정조는 이처럼 천주교는 국법으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 바로 서면 저절로 소멸된다는 논리로 사상 탄압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조는 조선의 성리학을 약화시키며 다원사상 체제를 지향했다. 정조가 자신을 성리학자로 자처한 것은 실제 그가 성리학자여서가 아니라 노론과의 이념 논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서양 과학지식의 습득을 통해 성리학이 이미 낡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는 재위 16년(1792년) 부친상으로 낙향해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정약용에게 정조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주며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계를 고안해보라고 했다고 전한다. 예수회 선교사이자 과학자였던 테렌츠(Terrenz.J, 중국명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기기도설’이 바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역학(力學)의 원리에 관한 책이었다.
‘정조실록’ 2년(1778년) 2월 14일조에는 정조가 천재로 유명한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 이가환(李家煥)과 논의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수준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일득록’에는 정조가 “땅이 둥글다는 설은 ‘주비경(周?經)’에 처음 보이는데 혼천(渾天)의 논리로 징험해보면 땅이 둥글다는 것이 분명하다. 남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낮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많이 보이며, 북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높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적게 보인다. 만일 땅이 둥글지 않다면 어떻게 그러하겠는가”라며 지구가 둥글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진다.
정조는 초인적 의지로 자신의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일체의 잡기를 멀리했다.
“나는 음악이나 여색(女色), 사냥 등은 좋아하는 것이 없고, 즐거워할 만한 인간사로는 국정을 하는 여가에 두세 문사(文士)와 경전(經典)을 이야기하고 시(詩)를 말하며, 옛일을 토론하고 지금의 일을 증험하여 심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일득록)
또한 정조는 검소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대체로 사람은 일용(日用)하는 의복이 한번 화려하게 되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내가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 사람이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정조의 이런 검소함은 확고한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 각신(閣臣) 김조순(金祖淳)에게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은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치철학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임금 노릇 하는 도리에 대해 여러 성인(聖人)이 말한 것이 지극하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고, 둘째는 조상을 본받고, 셋째는 백성을 사랑하고, 넷째는 어진 이를 높이는 이 네 가지 일이 곧 임금으로서의 훌륭한 절조이다.”(일득록)
이 시대 왜 정조가 다시 부각되는지를 잘 말해주는 구절들이 아닐 수 없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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