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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경치 좋은 곳에 서재를 만드세요

세칸 2007. 12. 7. 13:12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서재를 만드세요"

건축가 김원씨 새로운 설계 실험, 서울 옥인동 재개발 아파트에 적용

박선이 기자 sunnyp@chosun.com  입력 : 2007.12.01 00:33

 

한국 최고 건축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원 씨(광장 대표)가 문자 향 넘치는 ‘거실 서재’ 아파트를 실현한다. 김씨의 새 작업은 국민주택 규모(전용면적 85㎡ 이하) 아파트 300가구를 짓는 서울 인왕산 밑 옥인동 재개발 프로젝트. 그는 “한국 사람들의 삶을 지배해 온 ‘문기(文氣)’를 살린 집,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로서의 집을 짓겠다”며 아파트의 평면을 텅 비우고 이 중 가장 넓고 풍광이 좋은 곳을 가구마다 자기 형편에 맞게 거실 서재를 만들 수 있게 했다. 김씨의 설계 안은 최근 서울시 심의를 통과했다.

 

20년 전부터 거실을 서재로 써오고 있는 건축가 김원씨. /채승우기자 rainman@chosun.com 

 

“9평짜리 임대 아파트에 사는 홀어머니가 아이들과 함께 할 서재를 원하고, 산골짜기 외딴집에서 투병하는 아버지가 서재를 갖고 싶어합니다. 먹고 살기도 바쁠 것 같은 사람들이 서재와 책을 간절히 바라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거예요.”

성공회 성당, 통일연수원, 이화여대 글로벌타워, 주한 러시아대사관 등 역사적, 사회적 의미가 큰 건물을 주로 지어온 김씨는 지난 3월부터 ‘거실을 서재로’ 캠페인 중 매달 10가구씩 지원하는 맞춤형 서재 선정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9개월간 전국에서 서재를 만들어 달라고 보내온 사연을 500편 가까이 읽으며 건축가로서 정말 중요한 공부를 했어요. 가족이 아프거나 헤어져서 상처 입은 가정에서 치유의 방법으로 책과 서재를 소망하는 것을 보고, 한국이 얼마나 문기(文氣)가 강한 나라인지 실감했습니다.” 옥인동 프로젝트 아파트에서 그는 평생 꿈꿔온 한옥의 정신을 실현한다. “한국 집은 원래 기둥 4개를 한 칸으로 하는 모듈로 이뤄져 있습니다. 문을 달고 벽을 발라 공간을 구획할 뿐, 어떤 공간으로든 변형이 가능한 소프트웨어죠. 그림 걸 자리, 가구 놓을 자리까지 정해두고 짓는 하드웨어로서의 서양 건축과는 완전히 달라요.” 사방 9m의 정방형 아파트는 4개의 기둥으로 지탱될 뿐 내력 벽이 없다. 어느 집에서든 3면의 유리 창 너머로 인왕산과 북악산, 남산을 바라볼 수 있다. 서재를 겸한 거실은 가장 풍광이 좋은 방향에 앉히게 된다.


“창 밖으로 푸르름이 보이고, 시야가 멀리 트이고, 경치 좋은 곳에 서재를 두면 온 가족이 생리적으로 정서적으로 건강해지고 머리가 맑아집니다. 덩치 큰 소파나 테이블도 필요 없어요. 편하게 기대 앉을 의자나 방석, 그리고 여기 저기 쌓이고 굴러다니는 책이 최고의 인테리어입니다.” 그러고 보니 김씨의 옥인동 집 거실 서재에서도 창 밖으로 남산과 인왕산이 보인다. 손때 묻은 소박함이 기품을 드러내는 이 집의 중심은 서가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실 겸 서재다. 그곳에서 김씨와 아이들이 함께 책 읽고 음악을 들으며 살았다. 그는 “거실을 서재로 캠페인을 시작한다는 뉴스를 보고 ‘올 것이 왔구나!’란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기, 문자의 향기란 말을 몇 번이나 거듭했다.

 

창 밖으로 인왕산 풍경이 펼쳐지는 옥인동 재개발 아파트의 가상 이미지.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에, 필요한 크기만큼 서재를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제공 

 
“중국 역사책인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에 가면 말몰이꾼도 길 가면서 책을 본다’고 써있습니다. ‘후한서’는 ‘고려에선 하인들도 시를 읊는다’고 기록했고요. 여염에서도 속기(俗氣)와 대비되는 문기를 가장 높은 가치로 쳤던 게 우리 사회입니다.” 김씨는 ‘거실을 서재로’ 지원 신청 사연마다 그런 문기로 가득 찬 것에 놀랐다고 말한다.

“거실을 서재로 란 말, 누가 생각해냈어요?” 그가 갑자기 묻는다. “텔레비전이란 바보 상자를 몰아내고 책이란 지식 상자를 들여놓자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런 문기를 수용하고 생산하기 위한 공간을 부활시키는 것이 건축가로서 저의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