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슬로시티' - 치타슬로(cittaslow·slow city·느리게 살기 마을)

세칸 2007. 12. 7. 13:02

세월도 쉬어가는 그곳?

담양군 창평면, 신안군 증도, 완도군 청산도, 장흥군 유치면 - 전통·공동체 정신 살아있는 ‘슬로시티’

박선이 기자 sunnyp@chosun.com 입력 : 2007.12.05 01:04

 

전라남도의 농·어촌 마을 네 곳이 아시아 최초로 '느리게 살기 마을'로 국제 인증을 받았다.

 

 

치타슬로(cittaslow·slow city·느리게 살기 마을) 국제연맹은 4일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시에서 열린 연차 총회에서 한국의 전남 담양군 창평면, 신안군 증도, 완도군 청산도, 장흥군 유치면 등 네 곳을 치타슬로 마을로 인증했다. 국제연맹은 이 네 곳이 “급격한 글로벌화와 도시화 가운데서 전통적 삶의 방식과 공동체 정신을 아름답게 지켜내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치타슬로국제연맹은 ‘느리게 살기의 미학’을 추구하는 최초의 국제 조직으로, 세계 많은 도시(마을)가 인증을 신청할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1999년 이탈리아에서 출범했으며, 자연 환경이 풍부하고 전통 유산과 지역 특성이 남아 있는 인구 5만명 이하 지역(마을)을 회원 도시(마을)로 인증하고 있다. 치타슬로 마을은 대형 마트나 패스트푸드점 등이 없어야 한다. 현재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독일, 노르웨이 등 11개 국가의 97개 도시가 가맹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지난해 일본이 신청했다 실패했으며, 이번 한국의 인증이 처음이다.

치타슬로 회원 마을로 인증받으면 온·오프라인을 통해 전 세계에 치타슬로국제연맹 네트워크 도시로 알려진다. 대신 회원 도시(마을)는 매년 100만원 정도의 회비를 국제연맹에 내야 한다. 한국치타슬로추진위원회 손대현 회장(한양대 교수)은 “치타슬로 마을 인증은 식품·공예품·관광 산업에서 큰 지명도를 얻고 있다”며 “이번 인증 마을에서 생산한 식품·공예품에 ‘치타슬로’ 인증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세계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느리게 사는 게 오히려 이익이다”
'치타슬로' 실사단 따라가보니…

 박선이 여성전문기자(완도) sunnyp@chosun.com  입력 : 2007.09.14 23:50 / 수정 : 2007.09.16 02:14

 

“와~. 이 전복과 소라가 바로 여기서 따온 것입니까?” “이곳이 고향인가요? 연중 몇 달이나 이렇게 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치타슬로(cittaslow) 국제 연맹 회장인 로베르토 안젤루치씨가 해녀들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다도해로 향한 전남 완도군 청산도 장기미 바닷가. 커다란 바위와 자갈 해변 너머로 에메랄드빛 다도해가 펼쳐진다. 자맥질하던 해녀들이 초록색 그물자루를 걷어들고 바위 위로 올랐다. 50대 해녀들이 공기통 같은 장비 없이 몇 분씩 맨 몸으로 바닷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따온다는 설명에 안젤루치씨는 “놀랍다”는 말을 거듭했다.

영국, 독일, 스페인 등 세계 10개 나라 100여 개 도시가 가맹해있는 치타슬로 네트워크에 한국도 참여하자는 노력이 본격화되고 있다. 치타슬로는 슬로시티(slow city), 즉 느리게 사는 도시의 이탈리아식 표현. 달팽이를 상징으로, 그 자체가 브랜드다.

한국 슬로시티추진위원회(위원장 손대현 한양대교수)가 2년 전 결성된 뒤 올해 전남 담양(창평)과 장흥, 신안(증도), 완도(청산도) 4곳이 치타슬로 국제연맹에 치타슬로 지정을 신청했고, 현장 실사(實査)를 위해 안젤루치 회장과 사투르니니 전 회장, 다비데 바니 기술고문, 발렌티노 발렌티니 몬테팔코 시장 등 4명이 지난주 한국에 왔다.

 

전남 완도군 청산도 바닷가에서 로베르토 안젤루치 치타슬로 국제연맹 회장(왼쪽 두번째)이 해녀들로부터 물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아무 장비없이 몇 분간이나 바닷 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한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완도와 신안, 담양, 장흥 등 전남 4개 도시가 치타슬로 네트워크에 지원했다. /김준 목포대 교수 제공 

 

치타슬로는 ‘느리게 살기’가 철학이자 슬로건이지만, 실사 자체는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 지난 7~8일 이틀간 4개 마을을 살펴봤다. 모든 느린 것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으로 비쳤다. 구불구불 휘돌아가는 좁다란 마을 길과 빨강 파랑 ‘개량 지붕’이 독특한 정취를 빚어내고 있는 마을에서, 경운기가 못 들어가는 층층이 다랑논과 햇빛과 바람만으로 소금을 만들어 내는 천일염전, 죽염과 대숯을 만들게 해주는 대숲에서, 이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환경과 도시 기반 정책, 자생종 보호책, 친절 등 6개 부문 55개의 평가 항목에서 실사단이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마을의 자연-문화 환경이 어떻게 살아남아 있는가’였다. 주민들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대신 전통적 생산-유통 방식을 지켜나갈 의지가 있는지도 관심대상이었다. 글로벌 사회에서 세계박람회나 올림픽 개최 도시 선정이 대형 건설·개발 프로젝트를 내걸고 경쟁적으로 이뤄지는 것에 비추어, 치타슬로 지정은 정반대 논리에 기초해있다. 최대한 전통을 지키고, 도시 간 경쟁이 아닌 연대와 공존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속도와 효율, 경쟁이 아닌, 느림과 함께 살기의 미학이다.

한국보다 한 세기 먼저 근대화를 맞았고, 10년 먼저 ‘느리게 살기’의 아름다움에 눈 떴던 이탈리아의 치타슬로 운동가들은 한국 농촌의 새로운 활로는 ‘도시화’가 아니라 오히려 도시가 잃어버린 전통적 삶의 생명력과 문화, 기다림의 회복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역발상이다. 속도와 효율을 거부하고 불편함을 기꺼이 유지한다. 느림은 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치타슬로는 1999년 피렌체 남쪽 그레베 인 키안티와 남부의 포시타노, 로마 인근의 오르비에토, 브라 등 4개 도시 시장이 모여 출범했다. ‘빠른(fast)’ 시대에 맞서는 느림의 생명력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이번 전남 4개 지역 실사에 참여한 사투르니니 전 그레베 인 키안티 시장이 창시자다. 그는 마을에 세계적 패스트푸드 브랜드 맥도날드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마을 사람들이 운영해오던 카페와 전통 음식, 작은 광장, 좁은 도로를 지켜냈다.

이탈리아의 4개 도시에서 시작한 치타슬로 네트워크는 지금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대륙 10개 나라, 93개 도시로 확대됐다. 아시아와 미국에는 아직 치타슬로 도시가 없다. 일본이 지난 봄 20개 도시 네트워크 지정을 신청했다가 모두 보류됐다. 일본 도시를 실사한 치타슬로 국제연맹 관계자들은 “일본 도시들은 너무나 미국화되어 있어서 전통의 유지가 힘들어 보였다”고 설명했다.

치타슬로 도시가 되려면 우선 인구가 5만 명 이하라야 한다. 속도와 효율은 인간과 환경을 위협하는 요소로 여긴다. 패스트푸드, 대형 마트, 대량 운송 수단도 거부한다. 그 지역의 의식주 전통을 지키며,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목표다.

이탈리아와 영국, 독일의 치타슬로 도시는 인구 1만~2만 명의 소도시가 대부분. 치타슬로 네트워크가 국제 브랜드가 되면서, 이들 작은 도시는 사람답게 사는 삶을 경험하려는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치타슬로 네트워크를 홍보하는 1등 공신은 인터넷이다. 네트워크 홈페이지(www.cittaslow.net)를 통해 전 세계 치타슬로 마을 특성과 특산물을 알린다. 치타슬로 순례 관광상품도 나왔다.

치타슬로 실사단이 첫 방문한 곳은 전남 담양군 창평면. 인구 5000명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실사단은 500년 된 삼지천 돌담길과 옛 집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했다. 죽염과 죽염 된장, 댓잎 차, 죽력, 대숯 등 지역 특산품에도 관심을 보였다. 너른 마당에 크고 작은 항아리가 가득 놓인 전통식당에서는 된장, 간장 등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슬로 푸드’들, 그리고 젓갈과 나물 반찬에 감탄했다.

장흥에서는 특산 표고버섯이 주목받았다. 인구 2900여명의 작은 농촌 마을이지만, 한국에서 생산되는 표고버섯의 80%가 장흥에서 나온다는 설명에 실사단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지렁이 농법도 소개됐다.

남다른 체험은 둘째 날 신안군 증도에서도 이어졌다. 증도에는 요즘 세계적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천일염전이 있다. 옛 소금창고는 소금 박물관이 되어, 염전과 함께 근대 문화재로 지정됐다. 바닷물을 모아 햇볕과 바람의 힘만으로 소금을 얻는 이곳에서 실사단은 발로 수차를 돌려보기도 하고 끌개를 이용한 전통 방식으로 소금을 긁어 채취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완도군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이름난 곳. 완도항에서 여객선으로 40분 걸리는 청산도는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고인돌)와 300년 된 청산진성, 돌담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야외 박물관’이다. 마을 방앗간에서는 지금도 재래식으로 벼를 찧는다. 피댓줄이 왕왕 울리며 탈곡기가 쌀을 찧어내자 안젤루치 회장 등 실사단은 손으로 쌀을 받아 그 자리에서 먹어보기도 했다.

실사 결과는 11월 말 발표한다. 실사단과 동행했던 한국 치타슬로추진위원회는 “4개의 지원 도시 모두 아주 분위기가 좋았다”며 “적어도 2곳은 지정되고, 다른 2곳도 최소한 조건부 지정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치타슬로 지정이 과연 인구 2000~4000명의 농촌 마을에 무슨 성과를 가져올까. ‘국제**’라는 간판을 침소봉대하는 것은 아닐까. 서구의 ‘이국 취향’이 작용하는 ‘겉멋’ 아닐까.

국제관광경영전문가인 장희정 한국치타슬로 추진위원(신라대 교수)은 “관광, 식품산업 등에서 치타슬로의 국제적 친환경 브랜드 효과는 상상 이상”이라고 단언한다. “제대로 시간을 들여 키운 식물, 친환경적으로 생산한 육류, 전통적 방식으로 조리하는 지역 음식 등 슬로푸드가 지금 세계적 추세입니다.” 손대현 위원장은 “한국에 치타슬로 네트워크 도시가 지정되면 당장 일본 관광객을 불러올 수 있는 큰 자원이 된다”며 “치타슬로 상징인 달팽이 마크가 붙으면 식품의 국제적 평가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치타슬로 네트워크 
이탈리아 60곳으로 가장 많아… 세계 총 93개 도시 


치타슬로 발원지인 오르비에토, 그레베 인 키안티 등을 포함, 이탈리아 전역에 60여 곳으로 가장 많다. 900년 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오르비에토는 도시 내부가 차량 통행금지 구역이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는 2㎞가 안 되는데, 수백 년 전 마차가 다니던 시절의 도로 규모 그대로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성 밖에 주차장 시설을 두고 관광객이나 주민 모두 시내에서는 걸어다닌다. 그레베인 키안티에는 패스트푸드점과 백화점이 없고 인스턴트식품 자판기가 없다. 보도블럭과 벽돌은 모두 지역 전통방식으로 제작해 사용한다.

최근에는 영국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독일과 노르웨이, 폴란드, 호주, 뉴질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로 확산된 치타슬로는 이제 대도시의 일부 지역에서 실현 가능한지를 실험하는 중이다.
 
 

[빨리빨리]는 인간 파괴 바이러스

[슬로 시티] 창시자 伊 사투르니니, 완도등 국내 4곳 가입 심사차 방한
1999년 시장재직때 공동체 개조, 패스트푸드점·자판기등 없애고 버스대신 자전거타기 운동 펼쳐

유나니 기자= 글·사진 nani@chosun.com 입력 : 2007.09.07 00:10 / 수정 : 2007.09.07 03:00

 

1999년, 이탈리아 중북부의 작은 마을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ti)는 획기적 ‘공동체 개조’를 시작했다.

“빨리빨리 살 것을 강요하는 바쁜 현대 생활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라고 취임사에서 말했던 시장(市長)의 단안으로 이 마을은 ‘느리게 살기’를 실천하는 초유의 ‘슬로 시티’(Slow City)로 거듭났다. 자판기, 냉동식품, 패스트 푸드점, 백화점, 할인 마트가 발붙이지 못하게 됐고, 주민들은 토속 음식들을 먹고 버스 대신 자전거를 탔다. 1만 4000여 주민들 삶을 바꿔놓았던 이 운동은 전 유럽으로 전파됐고 현재 10개국 90여개 도시가 슬로시티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그 이탈리아 시골 마을 시장이자, ‘슬로 시티’운동의 창시자인 파올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57·사진)씨가 한국에 왔다. 로베르토 안젤루치(Roberto Angelucci) 슬로시티 국제연맹 회장 등과 함께 그가 방한한 것은 이 연맹에 가입을 신청한 전남 완도군 및 담양·장흥·신안군 등 4개 지역을 찾아가 자격을 갖췄는지 심사하기 위해서다. 6일 한국관광공사를 방문, 기념 세미나를 마친 사투르니니 씨는 “한국은 전통이 강한 나라고 독특한 개성이 넘쳐 이번 한국 마을 방문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8년 전 슬로 시티를 처음 만들겠다고 했을 때 주민들 반발이 엄청났다”고 회고했다.

“한마디로 마을 발전은 어떻게 하느냐는 거죠. 하지만 나는 ‘전통과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개발을 꾀하면 우리 마을이 진정한 발전을 하게 된다’고 끊임없이 설득했습니다.”

해가 거듭되면서 주민들은 그 ‘진정한 발전’을 체감하게 됐다.

“마을 한복판 광장엔 이 마을에서 나는 흙으로 주민들이 직접 구운 벽돌을 깔았어요. 호텔이 필요하면 새 건물을 짓는 대신 오래된 마을의 성(城)을 개조해서 꾸몄습니다. 마을이 훨씬 운치있어졌죠. ‘슬로 시티’운동이 알려지면서 관광객도 늘어나니 주민들 삶이 넉넉해질수밖에요. 지금 그곳엔 실업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레베 인 키안티 주민들이 느낀 ‘발전’은 관광 수입 증가에 머무는 게 아니다. 삶의 질이 향상된 것이다. 가령 식료품의 경우도, 대형 마트에서 잔뜩 사다가 냉동실에 쌓아놓고 먹는 대신, 필요할 때마다 동네 가게에 쪼르르 달려나가 사다 먹으니 훨씬 신선한 것들을 섭취한다. 주민들이 눈에 띄게 건강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투르니니 씨는 “냉장고 쓸 일이 별로 없어 아마도 세계에서 냉장고 용량이 제일 작은 마을일 것”이라며 웃었다.

사투르니니 씨는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산업화의 흐름을 거스르는 세계 ‘슬로 시티’ 운동의 선구자가 된 것은 ‘자연의 삶’을 살았던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저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어요. 어린 시절엔 우리 마을에도 산업화 바람이 불어 젊은이들이 다 도시로 갔지만, 여러 해가 지나자 떠났던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오더군요. 전통적인 것들의 가치를 다시 깨달은 거죠. ‘슬로 시티’ 운동에 관한 영감은 이런 개인적 경험에서 얻었습니다.”

사투르니니 씨는 “나는 지금까지 바빠서 허겁지겁 뛰며 살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우리의 ‘슬로’라는 개념은 단순히 ‘패스트(fast)’의 반대말 개념이 아닙니다. 환경, 자연, 시간, 계절을 존중하고 우리 자신을 존중하며 느긋하게 사는 것. 이것이 더 나은 삶을 향한 진정한 ‘슬로’입니다.”

그는 “느리게 사는 것이야말로 ‘라 돌체 비타(La Dolce Vita·달콤한 인생)’가 아니겠냐”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슬로 시티(slow city) 운동

한삼희 논설위원 shhan@chosun.com  입력 : 2007.09.07 22:48 / 수정 : 2007.09.07 22:49


고교 때 화학선생님 별명이 ‘황소’였다. 걸음걸이가 황소처럼 느렸다. 비가 거세게 오던 날, 황소 선생님은 출석부를 옆구리에 낀 채 느릿느릿 걸어갔다. 학생이 물었다. “비가 쏟아지는데 왜 안 뛰세요?”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뭣하러 바보처럼 뛰어가서 앞에 내리는 비까지 맞냐!” 작가 김문수가 ‘우보만리(牛步萬里·소걸음이 만리를 간다)’를 가르쳤던 선생님을 회상한 글이다.


미국 사업가가 남미로 휴가 가서 그곳 어부에게 더 열심히 일해 부자가 되라고 설교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낮잠도 자지 말고 열심히 물고기를 잡으라고 했다. 그러면 큰 배를 살 수 있고 생선공장을 차리고 나중엔 자기 브랜드로 도회지에서 큰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를 듣고 난 어부가 물었다. “그 다음엔 뭘 하죠?” 사업가가 말했다. “한적한 시골에 살며 늦잠 실컷 자고 매일 저녁 기타 치고 친구들과 놀면 된다.” 어부가 말했다. “지금 내가 그걸 하고 있는데.”


‘슬로 시티(Slow City)’ 국제연맹의 창시자 파올로 사투르니니씨가 한국에 왔다. 그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 인 키안티의 시장으로 자기 마을을 슬로 시티의 발신지로 만든 사람이다. 그 마을엔 자판기도, 패스트푸드 가게도, 백화점, 할인점도 없다. 주민들은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광장에 까는 벽돌도 주민들이 그 고장 흙으로 구워 만든다.


처음엔 주민들이 “불편하다”고 많이 반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슬로 시티 운동은 10개국 90개 도시가 가입했을 정도로 번져나갔다. 우리나라도 전남 완도·담양·장흥·신안 4개 군이 가입 신청을 했다. 사투르니니씨는 4개 군의 자격을 심사하기 위해 방한한 것이다. 전남은 전통이 강하고 자연환경도 풍부한 곳이다. 슬로 시티 운동과 잘만 접목시키면 나름의 지역 브랜드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속도전에 임하는 용사처럼 사는 시대다. 남보다 한 발이라도 앞서갈 욕심으로, 또는 나만 낙오되지 않나 두려워 1분1초를 가만있지 못한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상소는 “빨리 달려가면 갈수록 삶이 여유로워지기는커녕 더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 당한다”고 했다. 슬로 시티 운동이 느리게 사는 삶의 맛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으면 싶다. 가끔 텅 빈 머리로 하릴없이 쏘다니는 달콤함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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