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작가 이문열, 글 못쓰면 내 삶도 끝

세칸 2007. 11. 24. 18:09

[作家  李 文 烈]

미국생활 2년 “한국은 돌아가야 할 곳… ” 

“내 문학 테러당할때 작가들 침묵… 크게 상처받아”

 

최보식 기자 congchi@chosun.com 

입력 : 2007.11.23 23:06 / 수정 : 2007.11.24 11:31

 

“글 못쓰면 내 삶도 끝 아니겠소” 
 

미국 보스턴 시내를 관통하는 찰스강변의 호텔에서 만났을 때, 이문열(59)은 내년이면 환갑인데”라고 말했지만 그에게 세월은 멈춘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검고 얼굴은 살이 올라 있었다. 툭툭 부스러질 것 같은 경상도 방언도 그대로였다. 그는 작년에 미(美)서부 버클리대에 있었고, 지금은 하버드대에 방문연구원 신분이다. ‘미국 물’을 마신 지 만 2년이 됐다. 그는 “그때 워낙 얽히고 시달려 심신이 지쳐 떠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언론매체와 문단에서 구체적으로 겪었던 소외감, 울분, 섭섭함을 털어놓으며, “이런 것은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라고 했다. 그는 여전히 국내의 굴레를 못 벗어난 것 같았다. 그는 인터뷰에 대해 불안해했고, 자신의 지금이 어떻게 비쳐질까에 망설였고, 둘째 날 약속시간에 나타났을 때는 그 압박감으로 얼마간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이틀간 만났는데, 그때마다 그가 먼저 “그래, 어떻게 될 것 같아요?”라며 국내 대선을 화제로 꺼냈다. 내가 어물어물 답하면, “정말 그렇습니까? 나는 그렇게 안 보는데”라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나는 녹음기를 켠다는 사실을 알려준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2년이 됐는데 아직도 한국 정치 상황에 그렇게 몰두합니까?

“어쨌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나는 한국을 완전히 떠나서 산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어요. 작가로서 내 언어가 없는 곳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와있는 동안 국내 상황이 개선되고 치유되고 해소되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오히려 다른 흐름이 보이고 있으니. 이회창씨도 나오고, 국내의 소위 보수세력들이 하는 걸 보면 나를 참담하게 만들어요. 내가 그동안 어쨌든 보수 편에 섰던 결과가 ‘아 이거였어, 이거였어’ 하는 느낌이 많이 든다는 거죠.”

그는 “정치적인 걸로 시작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벌써 녹음하고 있지요?”라고 말했다.

“아마 내가 다시 돌아가면 정치적 허무주의로 회귀할 것 같아요. 과거 80년대 중반 시절의 내 작품 세계로. 무(無)이념의 이념, 문학 자체의 목적성, 사인성(私人性)의 문학이라든가. 그때는 이념을 현상으로만 봤지요. 이를 가치 판단의 대상으로 삼고, 거기에 내 자리를 만들고 편든 것은 그 후의 일이지요.”

 

보스턴의 찰스강변 도로에 선 이문열. /최보식 기자 


―그런 입장은 이렇게 저렇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요?

“내가 전체적으로 돌아가겠다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진행된다면’ 하는 전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무 희망이 없는 것이지요.”

―이대로 간다는 것은 이번 대선에서 혹 한나라당이 패배하는 경우를 말씀하는 건가요?

“뭐, 구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일은 그게 되지만, 그게 아니고. 세상이 가는 방향, 변화의 모습인데, 그 모습이 만약 지난 8년 동안 겪어온 것처럼 똑같은 형태로 재현된다면 하는 것이지요.”

―지난 8년 동안의 진행 중에서 어떤 문제가 가장 결정적이었지요?

“2003년이었던 것 같아. 갑자기 삶이 팍팍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것은 어쩌면 용도폐기 된 개념처럼 됐지만, 그래도 우리 존재의 근거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요. 나는 대한민국(정부수립)과 동갑이에요. 지금까지 60년을 살았습니다. 살면서 대한민국이 불만스러웠던 적이 당연히 있었죠. 하지만 내 조국이었고, 아무 의심 없이 세금도 당연히 내야 되는 것이고, 군대 가라면 군대도 가야 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이 나라는 나라도 아니고 국민들을 학살하고,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는데…. 내 삶의 가장 보편적인 기반이 우스워진 거지요. 군대 가라면 군대 가고 세금 내라면 세금 낸 나는 ‘참 ×새끼다’ 싶기도 하고. 더 고약한 것은, 내가 늘 죽일 놈이라고 생각해오던 북한에 있는 부자(父子)는 대중적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거기서 오는 끝없는 허무감 같은 게 있었지요.”

 

문화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고의로 독자와 날 이간시키려는 징후에 분개 

 

―솔직하게 말해, 그보다는 선생 작품에 대한 테러(2001년에 있었던 책 장례식)에서 가장 상처를 입지 않았나요?

“상처라면 상처인데, 오히려 그것은 내가 일종의 자기 공세를 강하게 한 원인이 됐을 것입니다. 만약 그 사건이 없었으면 그때 내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했을까. 그 사건은 본질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았지요. 오히려 나는 그 사건보다는, 거기에 침묵하는 동료 작가들의 알 수 없는 침묵에 더 상처를 받았어요. 대부분 침묵했지. 애들이 정치운동으로 그 사건을 벌인 것은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이런 얘기 하지 맙시다. 이미 세월이 지났고.”

―선생은 보수 입장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문학적 자리가 훼손당하고, 다른 이념의 세력들로부터 폄하되고 타격받고 매도됐지요. 그런 상황이 거의 20년쯤 지속돼온 셈이군요?

“그렇다고 봐야죠.”

―현실적으로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하는 후회가 있나요?

그는 앞선 긍정을 철회하고 반격했다.

“내가 반드시 더 많이 잃었는가, 그건 다시 생각해봐야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를 지켜주고 자극한 것들도 있었지요. 그래서 20년을 (보수 입장에서) 글 써왔던 것이 반드시 내 삶에서 해롭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이 전투를 해야 되는 것에 대한 가치, 지금 보수라는 자들의 행태에 환멸을 느끼고 있어 그런 거지, 내가 저들을 위해 글을 써야 하느냐는 회의(懷疑) 같은 것이지, 현실적 손해 때문에 앞으로 이 입장을 더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이 때문에 두려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정말 야박한 해석이지요.”

―그런 20년 세월의 결과가 문단에서는 거의 외톨이로 남게 만들었나요?

전날 그가 마구 쏟아낸 푸념을 기억해 인용한 질문이었다.

“지금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니고, 내가 당장 내일 죽을 것도 아니고 아직 진행 중인데. 물론 내가 소수파가 됐다는 그런 느낌은 들지요. 정작 내가 분개를 한 것은 문화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나를 소외시켜버리는 인상, 일반 독자와 나 사이를 차단하고 이간시키려는 징후에 대한 것입니다. 일반 독자, 일반 대중들이 나를 소외시킨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작가가 어떤 이념이나 주의(主義), 사상에 정체되어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꾸 변하는 게 좋은 것인지, 안 변하고 자기 동선을 유지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제 경우에는 사실 안 변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는 쪽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도 많이 변해버렸어요. 공자는 ‘하우’(下愚: 가장 아래 바보)와 ‘상지’(上知: 가장 위의 천재)만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중간 사람들은 변한다는 거죠. 변하지 않는 걸 ‘불이’(不移)라고 하는데, 제 기본적인 지향은 변하지 않는 거죠. 다만 제가 바보 쪽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미국에 있는 이문열은“마치 물 밖에 있는 느낌 같다”고 했다. /최보식 기자 


―선생의 변하지 않는 본보기는 늘 과거에만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선생에 대해 복고적, 퇴영적, 봉건적이라고 비판하지요.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변하지 않는 것들을 과거라고 말하고 싶지 않고, 저는 이를 ‘본질’이고 ‘원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80년대 당시 작가들의 시대 흐름은 소위 ‘실천’‘민중’‘진보’ 쪽이었는데, 안 따라갔던 이유가 무엇이었지요? 그 자체가 틀렸다고 본 겁니까? 아니면 본인의 개인적 성향이나 성장과정과 맞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정치적 역동성에 대한 불신이었죠. 다수가 집단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불신이 많이 있죠. 물론 내 집안이 겪은 것과도 관계가 있었겠지요. 또 하나는 일종의 정치적 무관심 같은 것입니다. 정치적 투쟁은 나와 무관한 것으로 봤지요. 역사적 허무주의였지요.”

―일본 근대 작가들을 보면 역사적 허무주의가 결국 군국주의(극우주의)로 갔지요.

“나도 그렇게 갔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사실은 내가 간 것이 아니고, 그들에 의해 몰려간 것이죠. 나도 악의(惡意)에 의해서 단련됐고, ‘괴물’이 된 거죠. 처음에는 사실 이쪽이 아니라 병든 낭만주의, 역사적 허무주의 비판을 받다가, 그냥 그쪽(보수)으로 몰려가 버린 것이죠.”

―그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문학적이나 독자들의 힘으로나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고 판단한 측면이 있었겠지요?

“이념과 힘의 균형이 역전된 90년대 중반에 ‘보수주의자’라고 커밍아웃한 작가는 아무도 없었지요. 그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독자 중에 소위 보수나 우파 쪽이 많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보수 세력이나 그쪽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겁니까? 아니면 본인의 자기 충족을 위해 쓰는 건가요?

“내 자신을 위해서는 잘 안 씁니다. 내가 글로써 정치에 적극 개입하게 된 것 중의 하나는 그들에 의해 몰린 면도 있지만, 보수 쪽 독자들을 위해 내 역할을 그렇게 맡은 측면도 있어요. 좀 유치하지만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독자들의 복리증진을 위해. 내 머릿속의 독자들은 물론 이상화된 보수주의자입니다. 이상화된 보수주의의 관점과 지금 목도하는 현실 사이에서 나는 괴리감을 느끼는 겁니다.”

―작가란 이건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어떤 절실한 욕망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있죠. 하지만 그 절실함의 배후가 뭐냐, 그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죠. 진실이라든지, 그러면 그 진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작품은 편지라고 봅니다. 받는 사람이 없는 글이란 없습니다. 가장 노골적인 것이 편지인데, 이런 편지에 붙은 단서가 답장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요. 일기는 일단 독자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정말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일기를 씁니까? 작가의 열정은 독자가 있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미국에 머물면서 달라진 게 있습니까?

“객관화 같은 거, 거리가 만들어진 건데. 내가 어느 입장에 속해 볼 때와 내가 한발 물러나서 관자(觀者)로서 지켜볼 때와는 다른 것이지요. 미국에 있다는 것은 마치 물 밖에 나온 느낌과 같은 것입니다. 물과 같이 흘러가버리면 물이 흘러가는지 모른다고요. 물이 흘러가는 것을 알려면 물 밖에 나와서 봐야지요.”

―본인 자신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보게 됐나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한국 안에 있던 이문열을 좀 객관적으로 볼 수는 있었겠죠.”

―그 한국 안의 이문열은 어떻게 보였나요?

“지난 18년 동안 ‘고약한’ 이문열이 같은 거죠. 그때는 필연적으로 싸워야 할 과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쓸데없다고 하기는 뭐해도, 꼭 필연적이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 상황에 다시 처하게 되면 다른 식으로 행동할 것 같습니까?

“다른 식으로 행동하거나, 아니면 그렇게 하더라도 훨씬 더 신중할 것 같아요.”

그는 이 말을 두 번 반복했다.

―그 때 신중하지 못했던 것들은 무엇이지요?

“자기 정체성의 폭로에서 너무 감정적이었고, 또 불확정적인 것들을 앞질러서 단정적으로 말한 것도 있어요. 만약 지금 한다면 그 감정의 폭을 줄일 것이고 불확실한 것은 말하지 않을 겁니다.”

―작가가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개입하고 참여하는 것에 대한 입장은 좀 바뀌었습니까?

“참여하고 표현할 수는 있겠는데. 그러나 현실 정치에 작동하는 힘이 되고자 꾀하는가, 아니면 관자(觀者)나 견자(見者)로서의 코멘트인가, 여기에는 차이가 있죠. 현 정부에는 내가 어떤 변화를 줄 수 있거나 어떤 작동하는 힘이 되고, 내가 무얼 막을 수 있다거나 혹은 도움이 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사실 굉장히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지요?

“그게 고약한데, 다음 세상에 태어나 무얼 해보고 싶으냐 하면, 그때는 혹 정치를 선택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근접거리에서 구경해봐도(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에 참여한 경력을 뜻함), 매력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지요. 오히려 나는 작가고 문인이라는 걸 훨씬 더 강하게 느꼈으니까. 내게 정치란 ‘이데아(이상)’로서 매력이 있었지요. 그런데 현실에서의 정치는 ‘이데올로기(이념)’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문열이 작품을 내면 기본 독자가 있어왔지요. 하지만 작년에 낸 작품 ‘호모엑세쿠탄스(처형자적 인간)’는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향후 선생의 작품에 대한 우울한 전조(前兆)가 아닐까요?

“이 작품이 문학으로 독자에게 접근되지 못하고, 정치적 관심으로만 요란스럽게 조명되니까, 이게 소설인지 정치인지 모르게 됐지요. 독자들은 마치 안 읽어도 다 안다는 식이 됐지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작품이 ‘안 읽어도 뻔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 작가에게는 치명적이지요?

“그거는 불리하겠지. 하지만 난 그 작품에 미련을 갖고 있는데. 보수주의 논객으로서가 아니라 한 작가로서 줄 수 있는 경고나 암시를 충분히 줬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받고 안 받고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니까.”

―작가 이문열 하면 연상되는 것이 있지요. 소위 머리에 ‘모자’가 쓰여진 셈입니다. 앞으로 그것이 달라질 것 같습니까?

“어떤 모자는 그만 썼으면 하는 것은 있지요. 물론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모자를 벗기기 위한 내 몫은 있을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있겠지요.”

―앞으로 새로운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글을 못 쓰면, 나도, 내 삶도 끝이지 않겠어요?”

좀 풀 죽은 목소리를 내던 그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려 “그런데 이렇게 묻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라고 힐난했다.

―선생 작품에 대한 세간의 선입견을 뛰어넘는 작품을 말합니다.

“그거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쓰기는 쓰겠지요. 내 존재기반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제는 자기 글이 안 좋다고, 가스나 엽총으로 자살하는 작가들이 우습게 안 보인다고요. 물론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데요.”

―말도 잘 안 통하는 미국 생활 2년, 언제까지 할 건가요?

“애초 여기에 나올 때도 많이 망설였어요. 낯선 세계에는 기회는 많겠지만, 오히려 내가 가졌던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거든요. 지금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더 머물러야 할지, 내 작가 인생의 종반을 남겨놨는데 이렇게 지내야 하는지. ‘이제부터 진짜로 미국 생활을 해봐?’ 하는 마음과 ‘그래봐야 뭐 뻔하지, 이만하면 돌아갈까?’ 하는 마음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어요.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 그럴지 모르지만.”

그는 서툰 운전 솜씨로 떠났다. 새 차를 벌써 네 번이나 긁었다고 했다.



인터뷰 후기

 

“내 작품 ‘시인’이 55번째 번역됐는데, 왜 말들이 없는지…” 


그와 만나 ‘예상 밖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약간 입만 축였을 뿐. 그는 “기분도 그런데 오늘 한잔해볼까”라고 중얼거렸지만, 그를 돌려보냈다. 엄청난 주당(酒黨)이었던 그는 요즘 술과의 전쟁 중이다.

“몸에 경련이 일어나거나, 혈압과 당뇨 등 이런 치명적인 공격들이 시작됐다. 실제로 많이 약해졌다. 국내에서 술을 한번 마셨다 하면 거의 정신을 잃었다. 여기 와서는 그렇게 폭음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마치 60년 된 친구하고 작별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는 “정치 얘기만 한 것 같아 기분이 고약하다. 얼마 전 독일 주어캄프(Suhrkamp) 출판사에서 내 작품 ‘시인’이 번역됐다. 이는 내 작품의 55번째 번역이다. 다른 작가들의 번역된 작품은 대단하게 떠들면서, 국내 작가로서 가장 많이 번역된 내 작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왜 내 작품이 외국에서 얼마나 번역됐는가에 대해 정식으로 묻지 않았느냐?”고도 했다.

다음은 이문열 독자들을 위한 질문이다.

―지금까지 쓴 작품 중 제일 애착이 가는 작품은?

“애착이라는 말 자체가 굉장히 애매한 말이다. 네가 쓴 작품 중에 만족도가 높은 것은 어떤 것이냐? 아니면 너한테 가장 큰 혜택을 준 가장 고마운 작품이 뭐냐? 이렇게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좋은데.”

―그러면 만족도가 높은 작품은?

“중단편으로는 ‘일그러진 영웅’ ‘금시조’ ‘들소’ ‘아우와의 만남’이다. 장편 중에는 ‘시인’ ‘황제를 위하여’ ‘사람의 아들’ ‘아가(雅歌)’다. 국내외적으로 고루 평가가 좋은 작품은 ‘시인’이다. 작품을 쓸 때 아주 흥미롭게 썼던 것은 ‘황제를 위하여’다. ‘사람의 아들’은 그때 내 나이에서 그만큼 만들어냈다는 데 만족스럽다.”

―가장 혜택을 받은 작품은?

“역시 ‘사람의 아들’이다. 내 출세작이고 200만 부 넘게 팔렸다.”

―작품과 관련해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삼국지’로 알려지는 것이 상당히 불만스러운 대목이다. 당초 작가가 할 수 있는 부업으로 생각했는데, 삼국지가 다른 작품들을 압도했다. 돈벌이 측면에야 물론 많은 도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