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훔쳐보기]의 즐거움

목공예가 문영효

세칸 2007. 9. 16. 14:49

목공예가 문영효

 

 

전통 서각공예의 대중화 실현

지난 96년 조성된 고양시 덕양구 내유동에 위치한 공예단지는 목공예가들이 시의 지원아래 함께 모여 공예가의 길을 잇기 위해 탄생시킨 곳이다. 그 속에 미성공예도 공예단지의 시작부터 자리를 잡고 다양한 목공예 작품과 제품의 개발에 매진해오고 있다.
목공예를 아이템으로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이뤄낸 히트상품 서각공예품을 비롯해 다양한 제품이 끊임없이 탄생시키는 목공예가 문영효씨를 만나 젊은 공예인의 다짐을 들어보았다.

 

20년 이은 히트상품 "서각공예"
Image_View문씨의 목공예와의 인연은 20여년전 서라벌공예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손재주가 있던 문 사장이 1979년 서울의 한양목공예학원에서 서각에 대한 기술을 수료한 뒤 처음으로 설립한 것이 전통의 목공예품을 생산하던 서라벌공예였다.
목공예품에 대한 인기는 날로 높아졌지만, 제품이 다양하지 못했고 전통의 것만으로는 경쟁을 이겨나가지 못했다. 유통망의 확충, 제품의 홍보와 작품성의 결여로 새로운 아이템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2년이었다.
고민하고 준비하는 일에 3년의 시간을 투자하고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 1985년 설립된 미성공예다. 잘 다듬어진 나무판에 교훈이 되는 글귀나 그림을 새겨 넣는 일을 서각이라 부른다. 이 서각을 아이템으로 처음에는 인사동에서 전시판매될 작품성이 깃든 것들을 주로 제작했다. 작품에 치우치다보니 제작 시간이 길어지고, 질 좋은 나무를 고르다 보니 당연히 가격도 높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즐겨 찾는 이, 사고 싶은 이가 많았다. 주문이 늘기 시작했고 이일을 계기로 서각공예 제품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며 감상할 수 있도록 양산체재를 갖추는 일이 새로운 도전과제가 됐다.
서각공예품의 양산을 시작하려면 공예가와 재료를 더 필요로 했다. 공예로 적당한 특수목으로 건조가 잘된 마디카, 알마스카를 주로 쓴다. 10년 15년이 넘는 공예 기술인 한 사람이, 간단한 제품의 경우 하루에 서른 장, 마흔 장까지 작품을 파내려 간다.
효율적인 작업을 위해 재단과 틀을 짜내는 목공부, 작품을 탄생시키는 서각부, 사포질 등 표면을 정리하는 부서, 도장실, 조립과 포장실로 세분화 시켰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글귀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목재 재료와 장인의 각자하는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글귀의 교훈이 서각공예품의 가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로 기독교의 성구, 성당, 불교, 성어, 가훈 등 각 계에서 사람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는 문장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새 보금자리, 고양시 공예단지 입성
Image_View밤낮없이 움직이고 공장의 기계를 돌리며 일의 보람을 만끽했던 때를 1990년부터 95년까지로 기억한다. 이때를 서각공예의 호황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서각공예품의 양산판매가 성공의 결실을 맺을 때 쯤, 미성공예에는 20여 명의 서각공예 전문가들이 한 식구가 돼 있었다.
회사, 음식점, 가정집 등 어느 곳을 방문 하던지 한 눈에 들어와 맘을 움직이는 글귀를 보는 일이 지금은 쉽겠지만, 이 제품의 시작에 서각공예품의 대중화에 성공한 미성공예와 문 사장의 노력이 있었다.
1996년 12월, 크고 작은 목공예 업체가 고양시의 지원에 힘입어 지금의 공예단지를 조성하면서 구파발 지축동의 사옥을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현재의 공예단지로 이전했다.
영세 규모의 목공예인들이 안정된 보금자리를 통해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뜻 깊은 계기가 됐지만, 목공예라는 유사한 아이템으로 모인 공예단지는 종종 동종업종간의 경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더욱이 미성공예는 전국공예품 경진대회를 비롯해 1995년 경기도 우수 공예업체로 지정된 후부터 미성공예의 대외적인 활동도 빛을 보기 시작했고 이후 99년에 월드컵 우수 공예품 지정업체로 선정됐으며, 같은 해 경기도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월드컵 우수 공예품 지정업체로 선정된 뒤, 부푼 꿈을 안고 수출을 위한 공예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기술과 자금에 대한 투자를 끊임없이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재정적 지원이나 투자가 전무했던 터라 중도 포기했었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준비하는 제품이 세상에 나올 때면, 사람들이 무척이나 좋아할 것 같습니다"며, 당시에 대안이 미약했던 정부정책에 휘말려 많은 중소기업들이 피해를 봤다고 문 사장은 고백한다.


제품 다양화를 통한 미래대안
Image_View공예단지 찾아오는 길이 불편해도 사람들은 미성공예를 즐겨 찾아준다. 미성공예가 사람들의 발길을 공예단지로 향하게 하지만, 그 고객들이 이웃한 목공예 업체를 찾는 일도 자주 생겨났다. 고정거래처가 하나둘 줄지만, 함께하는 세상이고 찾아가는 사람의 마음을 어찌할 수 있을까.
문 사장의 숙제는 다양한 제품을 통한 경쟁력 확보로 이 모든 부분을 이겨내는 일이다. 제품의 디자인을 위해 홍대에서 전문분야 교수님들의 지도를 받기도 하고, 전문디자이너를 고용하기도 했다. 노력은 거듭되는데도 아이엠에프를 전후해 판로가 막히고, 베트남, 중국 등지에서 저가의 수입품이 우리의 전통 상품을 대신했다. 98년에는 공예단지가 수해로 침수되면서 수억원의 피해까지 입으면서, 기계를 잃고 작품을 잃었다. 계속되는 경기침체는 결국 사람까지 잃게 만들어 현재 공장에는 10명의 식구들이 남아 공예품 생산에 매진하고 있다.
미성공예는 올 여름을 지나면서부터 회생을 시작했다. 지난해 공예품 대전에 입선하면서 이름을 다시 새기며 국내 대형업체로의 납품 물량을 수주했다. 새롭게 선보인 향나무 찻상, 사진틀의 개발을 통해서도 일손이 바빠졌다. 곧 공장을 늘리고 직원을 늘릴 예정이다. 아쉬움이라면 사람을 믿고 공예의 기술을 보급하며 후배양성을 꿈꿔보지만, 이내 버티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전업을 해버리는 일이었다. 때문에 하루빨리 사람들의 공예가에 대한 시선과 전통공예사업의 번창을 실현시키고자 거듭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