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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통 위에 한국 건축을 심습니다"

세칸 2008. 8. 4. 05:25

"중국의 전통 위에 한국 건축을 심습니다"

중국에 빠진 건축가 승효상

 

천안문 광장 앞 '前門大街 프로젝트' 책임자로 선정돼
"제대로 된 도시 디자인은 도시의 구조를 바꾸는 것"

 

 

“우리가 겪었던 불합리를 겪지않도록 친구의 심정으로 중국에 조언하고 있어요.”

중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 승효상.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건축가 승효상(56)은 매일 중국어를 공부한다. 한자야 술술 넘어가지만 굳은 혀 풀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공부한 지 8년째. 그의 말대로라면 "식당에서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실력은 된다. 수졸당, 수백당, 웰콤시티 등 한국 건축사의 획을 긋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2002년 건축가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관하는 '오늘의 작가'에 선정된 한국 정상급 건축가. 그런 승효상이 중국에 빠졌다.

지난달 25일 대학로의 건축사무소 이로재(履露齋)에서 승효상을 만났다. 사무실 한쪽 구석에는 죽도가 꽂혀 있고(그는 검도광이다), 반대편 책꽂이에는 중국어 책이 눈에 띄었다.

"요새 중국에 많이 가요. 거의 살죠, 살아…." 부산 사투리 밴 말투로 승효상이 말했다. 그는 세계 유명 건축가들의 각축장이 된 중국에서 한국 건축계 대표선수로 맹활약 중이다. 중국의 상징인 만리장성 지역에 레저단지를 만드는 '장성 코뮌(Commune)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하이난섬에 '보아오 주택단지'를 지었다. 렘 쿨하스가 만든 CCTV 사옥 등 유명 건축물이 즐비한 베이징 CBD지역에 지난해 말 대규모 쇼핑타운 '차오웨이 소호'를 만들었다. 지난달 11일엔 디자이너 민경식씨와 함께 이로재 베이징 사무소를 열어 공격적인 중국 진출을 선언했다.

요즘에는 천안문 광장 남쪽 전문 앞에 있는 '전문대가(前門大街) 지역 보존·개발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전문대가'는 베이징의 심장부인 천안문 광장 지역에서도 '베이징의 간판' '중국인의 정신적인 축'으로 불리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오랜 역사가 묻어 있지만 노후화돼 베이징시 당국에서는 20만㎡에 이르는 대규모 지역 개발 계획을 세웠다. 승효상은 지난해 이 프로젝트의 마스터플래너로 선정됐다. 그는 과거의 흔적을 싹 밀어내는 식의 개발 대신 이전의 유산을 그대로 남겨두는 방식을 택했다.

"지문(地文·터무늬)이라는 게 있습니다. 건축에서도 땅에 묻혀 있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승효상은 이 지역에 남아 있는 800여 채의 사합원(四合院·미음자 모양 중국 전통가옥)과 중국의 옛 전통 골목 '호동(胡同)'을 고스란히 살리고 군데군데 중국의 회색 전돌로 만든 새 건물을 끼워 넣기로 했다. 당초 올림픽 개막 전에 마칠 계획이었지만 일정이 미뤄져 현재는 가림막으로 덮여 있는 상태다.

승효상은 "우리가 개발 시대 겪었던 불합리와 시행착오를 중국이 고스란히 겪을까 봐 걱정스러워서 진정한 친구로서 조언해주는 마음가짐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서양 건축은 이상적 모델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적합한 땅을 찾아 실현시키는 방식이고, 동양 건축은 땅을 보고 건물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에요. 땅에 대한 연구 없이 자신(自身)을 심으려는 것은 유린입니다. 중국 지식인 사이에서도 서서히 서양 건축에 대한 회의가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뭡니까."
 

승효상이‘유명 건축물의 전시장’으로 불리는 베이징 CBD지역에 지은 쇼핑?업무센터‘차오웨이 소호’/이로재 제공 

 

이야기는 어느새 한국으로 넘어왔다. 화살은 일단 이라크영국 건축가인 자하 하디드(Hadid)가 짓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날아갔다. 그는 현상 설계에 참여했지만 탈락했다. "내가 떨어져서가 아니고, 하디드 작품을 보면 동대문운동장이 가졌던 땅의 역사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그런 건물은 강남에는 어울리지만 그 터에는 안 어울려요. 한마디로 땅이 불쌍한 거지요."

승효상은 전문대가 프로젝트를 하면서 한국의 도시 정책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커진다 했다. "도시의 디자인은 도시의 구조를 바꾸는 데 초점을 둬야지 '예쁘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서울시는 성형수술이 필요한 도시에 알록달록 립스틱을 칠해 꾸미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 저만치 달아나는 중국 도시들에 대한 조바심이 스쳤다.
 

건축가 승효상씨가 최근 중국의 건축에 대해 이야기한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입력 : 2008.08.01 02:50 / 수정 : 2008.08.01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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