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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쓸 때는 마라톤하다 말고 100m 뛰는 기분"

세칸 2008. 4. 22. 13:13

"단편 쓸 때는 마라톤하다 말고 100m 뛰는 기분"

소설집 '슈샨보이' 펴낸 日작가 아사다 지로 인터뷰

 

소설과 영화로 제작된 단편 〈철도원〉과 〈러브레터〉, 장편 《칼에 지다》 등으로 잘 알려진 일본 소설가 아사다 지로(淺田次郞·57)가 신작 소설집 《슈샨보이》(대교베텔스만·일본어 원제는 '쓰키시마 모정'《月島慕情》)로 다시 한국 독자를 찾았다. 지난주 우리말로 번역돼 나온 이 소설집에는 단편집 《철도원》(1997년) 이후 특유의 '감동과 눈물의 문학'을 펼쳐온 아사다 소설의 깊은 맛을 확인할 수 있는 단편 7편이 실려 있다.

한반도가 꽃샘추위로 움츠러들던 3월의 마지막 금요일, 일본 도쿄는 따뜻하고 화창했다. 출판사 분게이?주(文藝春秋)의 인터뷰실에 나타난 작가는 창밖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 이야기로 말문을 텄다. "완연한 봄입니다. 한국에도 벚꽃이 피었나요?" 현해탄을 거꾸로 건너온 한국어 판 《슈샨보이》를 받아 든 작가는 "잘 만들었다"고 반복했다.

한국인에게 '아사다 지로의 문학'이라고 하면 늘 연상되는 단어들이 있다. 배려, 감사, 희망, 희생 등이 그것이다. 미국 단편작가 오 헨리의 소설 같은 반전의 묘미도 빠뜨릴 수 없다. 특히 '감동'이란 말로 당신의 소설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쓸 때 나는 '꼭 감동을 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소설은 설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가 문학적으로 감동을 느낀다면, 그것은 어른과 아이,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심지어 국적 여하에 관계없이 같은 종류의 감동이어야 한다고 믿고,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작품에 수록된 단편 〈눈보라 속 장어구이〉에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생명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이 극한까지 위험에 처해본 사람만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의 존재를 안다'는 표현이 있다. 당신의 문학은 늘 존재 자체보다는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것이 감동적인 내용으로 나타난 것 아니겠는가.
"그 작품은 내가 자위대 군인으로 근무하던 청년 시절, 태평양 전쟁 참전 군인들로부터 들은 것을 토대로 썼다. 병참체계가 무너져 전선으로 복귀하면 굶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군인이 등장한다. 나는 소설에서 다양한 삶의 가치를 다루지만, 이 작품에서는 특히 '인생의 행복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찾아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소설가 아사다 지로는“내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남녀노소와 국적을 불문하고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쓰 겠다”고 말했다.

도쿄=김태훈 기자 

 
태평양 전쟁에서 죽어간 일본군 가운데 식민지 조선인들도 많았다. 남의 전쟁에 끌려가 죽은 한국인 이야기를 썼다면 어떤 작품이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공부가 부족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국인이 일본군 신분으로 죽은 것은 그들에게 이중의 모순이었을 것이다. 사실 6·25 전쟁의 씨도 일본이 뿌렸다. 최근 일본에서는 북한의 일본여성 납치 문제를 많이 거론하고 있는데, 우리가 씨를 뿌린 분단과 통일 문제로 관심이 진전되지 못해 개인적으로 아쉽다. 일본인들은 너무 일본인 자신의 납치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다."

당신의 장편《천국까지 100마일》을 보면 '어머니가 말합니다. 나는 가난한 네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고. 부자인 네게 버림받고 싶다고'처럼 밑줄을 긋고 싶은 표현들이 많았다. 나름의 비법이 있는가.
"그 상황에 놓인 부모의 진심을 생각해보면 된다. 나는 내게 기발한 착상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소설 속 인물이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조금만 더 진지하게 생각하자'는 각오와 노력이 다른 작가에서 볼 수 없는 나만의 표현을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슈샨보이》 수록작 가운데 바퀴벌레와 생활하는 대학생이 등장하는 〈인섹트〉는 도시인의 고독한 내면을 다루고 있다. 카타르시스를 주기보다는 존재론적 고민을 철학적으로 사유한 작품으로 읽혔다. 새로운 아사다를 읽는 느낌이던데.
"1997년 소설집 《철도원》으로 나오키상을 받은 뒤 단편 작가로 유명해졌지만 나는 여러 분야의 소설을 쓰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장편 쓰기를 더 좋아한다. 지금도 전쟁소설과 코믹소설을 문예지 두 곳에 동시에 연재하고 있으며, 여름에는 역사장편 연재도 시작한다. 이럴 때 단편 청탁 들어오면 마라톤하다 말고 잠시 100미터 뛰러 가는 느낌이 들지만,(웃음) 프로작가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짐으로 받아들인다."

경마를 좋아하고,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카지노도 순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작품집에 수록된 〈슈샨보이〉도 경주마 이름을 딴 것이더라.
"세계 각국 유명 경마장을 거의 다 둘러봤다. 경마를 다룬 소설도 3~4편 정도 썼다. 경주마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걸 보면 꼭 소설의 등장인물이 명멸하는 것 같아서 친근한 느낌이다. 몸은 가만히 있지만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는 것도 소설 쓰기와 경마의 닮은 점이다. 내게 경마는 최고의 릴렉스 게임이기도 하다. 온천욕도 아주 좋아한다."

지난해부터 나오키상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는가.
"대중문학상이지만 문학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재미도 있는 작품을 뽑는 나오키상의 취지는 내 문학이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인간이 말(言)을 갖게 된 이후 문학은 늘 인간과 함께 해 왔다. 작가인 나는 수천년간 문학이 지속되며 이룬 성과라는 배턴(baton)을 받아 열심히 뛰고 있는 육상선수다. 이 배턴을 후대에게 잘 전하는 것이 내 임무이기도 하다."
 

도쿄=김태훈 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8.03.30 23:22 / 수정 : 2008.03.31 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