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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거부를 키워낸 아버지-스티븐 스필버그

세칸 2008. 2. 3. 01:39

세계 거부를 키워낸 아버지

스티븐 스필버그

 

 

 

 

 

“아버지와 사막에서 바라본 별잔치가 상상력 원천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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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에디슨학교에서 4년 동안 C만 받았다. 스티븐이 그렇게나 똑똑한데도 학교에서는 평범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실망했다.” (어머니의 회고)
“사람들은 여드름이 나고 수줍음을 타는 안경잡이를 앝잡아 보았다. 심지어 그를 ‘이상한 아이’. ‘공부벌레’, ‘겁쟁이’, ‘멍청이’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여동생의 회고)
“그는 매우 조용한 아이였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어서 참 안타까웠다. 그는 남들과 많이 달랐다. 뭐라고할까, 공부벌레라고 해야 하나. 복장이 매우 단정했다. 단추와 깃이 달린 셔츠를 입었다. 특징이 없는 착하고 몸집이 작은 소년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탔다. 다른 애들의 경우 모든 일을 자신의 마음대로 하기를 바라는데, 스필버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감 부족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정말 꿈에도 그가 어른이 되어 지금의 그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의 회고)

여기까지만 보면 이 주인공은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 되기 역부족인 것 같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담임마저 평범한 아이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 36살 때인 1982년에 매일 5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억만장자가 된다. 돈방석에 앉은 그는 여러곳에 투자를 했고 수백만달러어치의 부동산을 매입했다. 그리고 LA 부유층 지역 보시 벨 에어에서도 부동산을 구입했고, 맨해튼의 웨스트사이드에서도 최고급 아파트를 사들였다. 한마디로 그는 부와 명성을 동시에 거머쥐게 된 것이다. 그는 극장을 갖춘 1200만달러를 호가하는 저택에 살고 있다.

그는 누구일까? 다름 아닌 영화계의 황제로 군림하는 스티븐 스필버그(1946년생)다. 그의 어린시절은 결코 천재가 아니었다. 부모도 형편없는 아이라고 생각 했다. 그런 스필버그는 한 해에 무려 1000억원 이상을 벌어들이면서 세계 100대 갑부에 올랐다. 재산만 무려 30억달러(약 3조원)에 이른다. 영화계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황제가 아니라 현존하는 신이다.

 

20달러짜리 카메라로 영화감독 꿈 키워

 

그가 형편없는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특히 전기 기술자였던 아버지 아놀드 스필버그는 어린 아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했다. 어느 날 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사막 한가운데로 차를 몰았다. 아들은 아무 말도 없이 사막으로 달려가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10살 때쯤 애리조나에 살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자고 있는 나를 깨운 아버지는 잠옷 차림이었던 나를 황급히 차에 태웠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너무 무서웠다. 그 당시에 어머니는 함께 있지 않았다. 자꾸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는 커피가 담긴 보온병과 담요를 챙겼고, 30분 정도 운전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곳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길가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빈자리를 찾아서 담요를 깔고 나와 함께 누웠다. 아버지가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는 거대한 유성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수만 점의 빛이 하늘을 십자형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있을 것이라는 예견은 앞서 기상청에서 보도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아니, 나는 놀라움 이상으로 공포에 떨었다. 동시에 이런 현상을 유발하는 근원이 무척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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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에게 이 경험은 가히 우주적인 경험이었다. 이 경험은 이후 그의 삶에 상상력의 원천이 돼 주었고 영화감독으로 성공하는데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스티븐에게 이 기억은 너무도 생생하게 남았고, 18살 때 영화 <불꽃(Firelight)>을 만들면서 영화감독 인생의 서막을 열게 된다. 그때 스티븐은 고2 생이었다. <불꽃>은 다시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라는 영화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미지와의 조우>의 줄거리는 주인공이 그의 가족을 스테이션왜건에 태우고 야외에 나가 길가에서 밤하늘의 수많은 별을 관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그가 어린시절 겪었던 그 내용을 시나리오로 옮긴 것이다.
스티븐은 전기 기술자이자 컴퓨터 전문가인 아버지를 따라 1950년대 당시에는 불모지와 다름없는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살게 되었다. 컴퓨터 전문가인 아놀드가 피닉스의 GE사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는 불모의 땅에서 영화감독의 꿈을 키워냈다. 그것은 아버지에 이끌려 두려움 속에서 맞았던 별 보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스티븐은 애리조나를 고향이라고 말한다.
그가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던 계기는 아버지의 8㎜무비카메라였다. 스티븐의 어머니 레아는 남편에게 당시 20달러짜리 8㎜무비카메라를 선물했다. 별로 기능도 복잡하지 않고 저렴한 카메라였다. 이 카메라는 아버지보다 이내 아들인 스티븐의 소유가 됐다. 아버지는 가족여행 때 카메라를 가져가 사진 찍기를 즐겼다. 여행을 다녀와서 사진을 보면서 스티븐은 곧잘 카메라의 떨림이나 잘못된 구도 등을 지적하며 아버지가 사진을 잘 찍지 못했다고 했다. 화가 난 아버지는 “네가 그렇게 잘하면 네가 직접 하지 그러냐? 그럼 네가 해!”라고 했다. 이 말은 스티븐이 의도한 말이었는데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아들의 꾐에 넘어간 것이다.
카메라를 차지한 스티븐은 가족여행을 갈 때마다 자기 마음대로 구도를 잡고 찍을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한 편의 영화처럼 편집해 가족에게 공개했다. 아버지는 어떤 장면이 마음에 안 들어 “왜 이 부분은 이렇게 했느냐”고 물으면 스티븐은 “그것은 나의 관점이고 나의 선택이죠”라고 당돌하게 응수했다.
아놀드는 처음부터 스티븐이 영화감독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전기 기술자답게 아들이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란 아놀드는 스티븐이 엔지니어로서의 재능이 없어 늘 실망했다. 엔지니어가 되려면 수학이나 과학을 잘해야 하는데 스티븐은 특히 수학이나 과학을 싫어했다. 그는 아들이 엔지니어가 되게 구슬렸다. 아놀드는 “스티븐, 수학공부를 해야 돼!”라고 말하면 스티븐은 “난 그런 거 싫어해요”라고 했다. 스티븐의 학업태도는 아놀드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화학 실험을 싫어한 아들을 위해 요즘 우리나라 엄마들처럼 시험 준비를 대신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수학공부는 뒷전이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때 아놀드는 아들이 영화감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들려주었다. “그래, 영화감독이 되려면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단다. 잔심부름을 하고 한 단계씩 올라가야 해. 그건 아주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그러자 스티븐은 “아니에요, 아빠. 나는 내가 하는 첫 영화부터 감독이 될래요”라고 당돌하게 말했다.
그런데 정말 스티븐은 그렇게 됐다. 아놀드는 어쩔수 없이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 엔지니어로 키우고 싶다는 꿈을 포기했다. 단 아버지는 일정 성적 유지를 조건으로 스티븐이 영화 만드는걸 허락했다. 그가 롱비치의 캘리포니아주립대학(영문과)을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다. 스티븐은 낙제를 겨우 면할 정도의 공부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부모처럼 윽박지르고 우겼다면 오늘날 스티븐 스필버그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스필버그는 언젠가 “영화는 스토리텔링이고, 기술 매체가 아무리 발전해 배급 방식이 변할지라도 영화의 스토리텔링적 요소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영화는 스토리텔링이다. 기술과 매체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스토리텔링을 이루기 위해서다. 케이블이나 인터넷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기술 변화는 우리가 어떻게 소비자와 스토리를 소통하느냐를 위한 것이다. 배급 방식은 변하지만 스토리텔링은 변하지 않는다.”

 

선천적 이야기꾼 기질로 사람들이 원하는 얘기 안놓쳐

 

스토리텔링을 위해 스필버그는 ‘사람들이 지금 어떤이야기를 원하는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는 드림웍스사에 스토리 개발부서를 두고 단편소설과 장편 소설, 신문기사를 매일 체크하며 뒤진다. 때로는 아주 단순한 아이디어만 갖고 출발하기도 한다. 그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처음 발단은 아주 단순했다. 역사에 이름 남은 영웅이 아닌, 이름 없는 사람 이야기에서 출발하자는 것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스필버그 가문은 유전적으로 이야기꾼 기질을 이어받아왔다고 한다. 스티븐의 부모는 어린시절 그에게 이 사실을 들려주었다.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네살 때 아버지 무릎에 앉아 조상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러시아에서 왔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 오래된 나라의 매우 향토적인 내용이었다.” 스필버그 가문은 러시아계 유태인으로 1906년 러시아의 카메니츠-포돌스키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스티븐의 할아버지는 농부이자 목동, 사냥꾼이었는데 군악단으로 활동하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미국으로 도주했다.  이때부터 스필버그 가문이 미국에 와 신시내티에 정착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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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역시 내성적이었지만 어린시절부터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고 아놀드는 <타임>지와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스티븐이 내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게 보인다. 그도 역시 이야기꾼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나는 아이들에게 얘기해주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모험담 시리즈를 드려주곤 했다. 스티븐을 위한 시리즈가 있었고, 세 딸들을 위한 또 다른 시리즈도 준비해놓곤 했었다. 그 모험담 속에는 항상 내 아이들이 등장한다. 아이들은 동굴을 탐험하고,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나는 그들을 위해 과거를 여행할 수 있는 타임머신도 계발하고, 누군가를 구조하게도 했다. 나는 온갖 동물들과 인물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 또래의 여자애와 남자애 한 명씩을 만들어 냈는데, 그들의 이름은 조이 프로시 플레이크와 레니 러드헤드였다. 인물들이 아이들 또래였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과 연관지을 수가 있었다. 항상 이야기는 시리즈물로 계속되는 형식이었다. ‘이제 그만하자. 자야지. 내일 계속 해줄게’ 하며 이야기를 끝내곤 했다.”
아놀드에 따르면 스티븐은 이야기를 만들어내 이웃 또래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어린시절 스티븐의 친구인 제인 맥도널드 몰리는 아직도 스티븐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더운 여름날 심심할 때 대여섯 명이 집 옆 그늘에 모여 앉으면, 항상 스티븐이 이야기를 하곤 했다는 것. 이야기를 할 때면 아이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어린애들은 스티븐의 말을 그대로 믿곤 했다. 그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그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아하’, ‘정말?’, ‘야!’ 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는 것이다. 스티븐이 어린 여자애들에게 얘기해줄 때 상상력은 극에 달했다. 제인의 오빠인 스탠리 맥도널드는 “스티븐이 영화감독으로 유명해지지 않았더라도 잊지 못할 아이였다. 그에게는 배우 같은 면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스토리텔링을 중시하는 스필버그는 “내 영화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 목표다. 영화는 무엇보다 재미있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스필버그는 32살 때인 1978년에 만든 영화 <앰블린>으로 유니버설사와 파격적으로 7년 계약을 맺으면서 영화감독으로서 대장정에 오를 수 있었다. 여기에서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성공에 이를 수 없다는 가장 평범한 진리를 알 수 있다. 타고난 재능을 보여줄 수 있는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 그것이 스필버그가 최고의 감독이 되게끔 하는 열정이었던 것이다.
스필버그는 고속도로 상을 운전하고 있을 때 최고의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한다. 교통의 흐름을 타면서 계속 변하는 이미지의 흐름에 빠지게 되고 이런 이미지들이 창조적인 뇌를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죠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백 투더 퓨처> 시리즈, , <후크>, <그렘린>, <태양의 제국>,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 <쥬라기 공원>…. 그가 만든 영화마다 아이디어와 화려한 기법으로 관객들을 끌어 모으고 어린시절 우리가 꿈꾸었던 상상을 눈앞에 보여주는 감독, 그가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다.
스필버그는 1994년 설립한 ‘드림웍스’를 통해 사업도 확장하고 있다. 비디오 게임, 장난감사업에 뛰어든 것은 물론 ‘다이브’라는 패스트푸드점까지 개업했다. <비즈니스 위크>와 <이코노미스트>는 그의 ‘돈 버는 재능’을 특집으로 싣기도 했다. 잡지는 스필버그를 성공으로 이끈 열쇠를 끊임없이 솟아나는 아이디어와 이야기 구성 능력으로 분석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권력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스필버그야말로 어릴 때부터 자기가 하고 싶어 했던 일을 해서 결국 부와 권력,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 뒤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꾼의 DNA가 큰 작용을 했다. 스필버그처럼 한 인간의 홀로서기에는 자신의 노력과 함께 부모와 선조의 DNA까지 동시에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글: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romd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