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네 너희를 위해 남긴 것이 없다만

세칸 2007. 12. 29. 13:47
네 너희를 위해 남긴 것이 없다만
이정암의 유서[遺書 庚子八月二十四日]
 
 

 한양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정민교수

 

내가 작은 종기를 잘못 조리하여 마침내 독한 종기가 되고 말았다. 밤낮으로 고통스럽고, 죽음이 아침저녁에 있고 보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느냐? 나이 50이면 요절했다고 말하지 않는데, 하물며 나는 60을 살았다. 벼슬은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게다가 자손까지 있지 않느냐. 기꺼운 마음으로 눈을 감아 조금의 여한이 없다. 너희는 내 죽은 뒤에 장례 등의 일을 검약에 힘써 내 평일의 뜻을 따르도록 해라.
 
국장(國葬)이 끝나거든 바로 전포(錢浦)에 있는 죽은 아내의 곁에 묻고, 고양촌의 집에 신주를 모시고 슬픔을 아껴 효를 마치면 될 것이니라. 사람의 부귀와 빈천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서 부여받는 법이라 그 사이에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평일에 자손을 위해 산업을 영위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다만 너희들이 이미 재주와 덕으로 당세에 입신하지 못하였고, 게다가 가업(家業)조차 없고 보니 무엇으로 살아가겠느냐? 시골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 틀림없겠는데, 이 또한 운명이니 어찌 하겠느냐?
 
직장(直長)은 큰 형님께 출계(出系)하였는데, 또 아들 없이 요절하고 말았다. 제사가 끊길 것을 생각하면 잊을 수가 없구나. 경성(慶成)이가 성장하거든 세워 후사로 삼을 것을 의논해 보아라. 만약 그 처가 원치 않으면 굳이 할 것은 없다. 늙은 첩은 천리 길을 따르면서 온갖 기쁨과 슬픔을 모두 맛보았다. 하지만 아들이 없으니, 막내 홍(?)이에게 의탁케 함이 좋겠다.
 
넷째는 불행히도 전쟁 통에 죽어 골육을 묻은 곳이 제자리가 아니다. 떠도는 넋이 방황할 것이 더욱 마음 쓰이는 구나. 잠시 경란(慶蘭)이 크기를 기다려 전포로 이장해서 지하의 혼백이 서로 기댈 데가 있게 함이 옳을 것이다. 서울 서부의 작은 집은 따로 경란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 그 아비가 살았을 때 내가 그 집을 전해주려 했으므로 지금 다시 말해둔다.
 
전포의 묘지기인 종 언창과 여종 잉금, 그리고 과천 사는 종 막산과 그 소생의 세 자식 등은 제사 지내는 맏자손에게 대대로 전하라. 비록 많더라도 나누지 말고 힘써 거느려 살피도록 해라. 사당에 지내는 제사와 무덤에 지내는 제사는 모두 장자로 하여금 봉행케 하고, 여러 자손들은 힘껏 비용을 보태면 될 것이다. 이것이 내 유언의 대략이다. 나머지는 모두 도연명이 다섯 자손에게 고한 글 가운데 자세히 실려 있으니, 벽 위에다 붙여 두고 힘써 행하도록 해라. 어지러워 다 말하지 않는다. 두 아들과 네 손자, 그리고 두 사위에게 주노라.  
  
余以微痒, 將理失宜, 轉成毒腫, 晝夜苦痛. 死在朝夕, 夫復何言. 五十不稱夭, 況吾六十, 而官?宰列, 又有子孫哉. 甘心瞑目, 小無所恨, 汝等吾死後, 斂葬等事, 務從儉約, 以從平日之志.
國葬後, 卽?于錢浦亡夫人側, 返魂于羔羊村家, 節哀終孝可也. 人之富貴貧賤, ?於有生之初, 不可容力於其間. 吾之平日, 不爲子孫營立産業者, 以此. 但汝等旣無才德立身于當世, 又無家業, 何以得生? 其不免爲鄕人也必矣. 是亦命也, 奈何.
直長出繼于伯氏, 又無子而夭, 言念絶祀, 未能忘也. 慶成成長, 相議立爲後. 若其妻不欲, 則不須爲也. 老妾相隨千里, 備嘗甘苦, 而旣無子, 托之末兒?可也.
第四子不幸死于兵, 骨肉葬非其所, 旅魂飄飄, 尤可念也. 姑俟慶蘭成立, 令移葬于錢浦, 地下魂魄, 庶有相依可也. 京中西部小家垈, 別給于慶蘭爲可. 其父生時, 吾欲傳給其家, 故今復云云.
錢浦墓直奴彦昌, 婢芿今, 果川奴莫山及其所生三口等, 奉祀長子孫世傳. 雖多勿分, 務令護恤. 廟祭墓祭, 皆令長子奉行, 諸子孫隨力助奠可也. 此其大略, 餘則具于陶淵明告五子孫書中, 付諸壁上, 勉以行之. 荒迷不宣. 付二子四孫二壻.

이정암(李廷?, 1541-1600)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과 손자, 사위 등에게 준 유서다. 글 속에서 도연명이 아들 엄 등에게 준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 이야기를 꺼냈다. 그 글의 한 대목은 이렇다.

내 나이 50을 넘겼다. 젊어서는 곤궁하여 늘 집안의 가난함 때문에 동분서주하였다. 성격은 뻣뻣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사물과 더불어 어그러짐이 많았다. 혼자 자신을 헤아려 봐도 필시 세속의 근심을 받으려니 하였다. 애써 세상을 떠나 지내느라 너희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춥고 주리게 하였다. 내 일찍이 한나라 왕패(王覇)의 어진 아내 유중(孺仲)의 말에 느낌이 있었다. 낡은 솜옷을 걸친다 해도 어찌 자식들에게 부끄럽겠느냐? (중략) 질병을 앓은 이후로 점점 쇠약해지는구나. 친구들이 날 버리지 않아 매번 약석으로 도움을 받지만, 수명이 장차 다해갈까 염려되는구나. 너희는 어리고 집은 가난하여 매번 나무하고 물 긷는 노고를 감당하니, 어느 때나 면하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중략) 《시경》에서는 “높은 산을 우러르며 큰 길을 간다”고 했다. 비록 능히 이렇게 할 수는 없다 해도 지성스런 마음으로 이를 숭상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은 삼갈진저. 내 다시 무슨 말을 하랴.

나라에 국장(國葬)이 있어 바로 장례 할 수는 없을 테니, 국장이 끝난 후에 먼저 간 아내 곁에 묻어달란 당부를 남겼다. 인간의 부귀빈천은 작위로 될 일이 아니어서 넉넉한 살림을 남기지 못하고 가는 것을 미안해했다. 여러 자식과 손자에게 제사 받드는 문제를 말하고, 집안의 큰 일들을 가늠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연안성 전투에서 왜군에게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막상 그가 조정에 올린 장계는 “적이 아무 날 쳐들어 와서 아무 날 물러갔나이다.”란 딱 한 줄 뿐이었다. 그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제 공을 내세워 자랑하기 바쁠 자리에서도 남의 일 말하듯 한 줄 글로 보고했다. 죽음을 앞두고 담백하게 써내려간 그의 유서에서 또 그의 성품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