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비오면 생각나는 부침개 냄새, 어머니 냄새

세칸 2007. 12. 28. 11:52

詩로 읽는 세상사

비오면 생각나는 부침개 냄새, 어머니 냄새

잦은 비에 밀가루·식용유 매출 급증

 

illust 권오택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새끼제비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 정일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에서
 
작가 윤대녕이 한동안 된장을 찾아 돌아다닌 적이 있다고 했다. 몇 해나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를 돌며 집에서 담근 된장을 일일이 얻어먹어 봤다. 모두가 훌륭한 맛이었다. 하지만 그가 찾는 그 깊고도 그윽한 맛은 아니었다.
 
윤대녕이 제주도 살 때 애월의 한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된장찌개를 먹다 자기도 모르게 그만 코끝이 찡해지고 말았다. 오랫동안 속에 응어리졌던 것이 순식간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실컷 울고 난 뒤처럼 후련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슬그머니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충청도라고 했다. 그는 내심 놀랐다. 그의 고향도 충청도였다. 그 아주머니의 된장찌개 맛은 바로 어머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 맛이었던 것이다.
 
어릴 적 신열(身熱)을 앓아 누우면 꿈인 듯 아닌 듯 천장이 온통 구겨지고 물결쳤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복숭아 통조림을 사다 떠먹여 주셨다. 평소엔 엄두도 못 내던 황도(黃桃) 통조림은 감기의 고통을 상쇄할 만큼 달콤했다. 황도를 먹은 지 꽤 됐다 싶으면 앓는 게 기다려질 정도였다. 혼자 그것도 객지에서 아플 때면, 어린 이마 짚어 주던 어머니 손처럼 부드럽던 그 통조림 복숭아를 서럽게 그리워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음식은 어머니이고 고향이다. 모성(母性)이고 향수(鄕愁)다.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새끼제비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 정일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음식은 그 음식과 얽혔던 시·공간을 절절한 그리움으로 되살려낸다.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 안도현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시인은 궁핍하고 미진해도 지키고 자족하며 살던 그 시절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한다. 지금 이리도 호사로운 세상을 살기 힘들다고 한숨 쉬는 게 투정이고 엄살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어쩌다 맛본 쌉싸름한 젓갈이 ‘일곱 살 적/ 나 젖떼게 하려고/ 어머니 붉은 젖꼭지에 발라놓은/ 담뱃진 맛 같았다’(이진영·전어 밤젓)며 어머니의 젖가슴을 떠올리기도 한다. 생명의 양식이 돼 줬던 어머니의 젖내음을 맡는다.
 
음식에 순박한 미각과 동심(童心)을, 가족의 온기(溫氣)와 삶의 체취를 아련하고 푸근하게 담아낸 시인이라면 단연 백석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우리 토속 음식만 150가지가 넘는다. 백석은 누구보다 아이들에게 더없이 넉넉하고 흥겨운 축제, 명절을 다채로운 후각으로 되살렸다.
 
‘여우난골족’에선 여우 나는 골짜기의 큰집에서 수십 혈족들과 왁자하니 어우러지는 설을 냄새로 좇는다. 지치도록 떠들다 잠든 설날 아침 아이들을 깨우는 것도 맛난 음식 냄새들이다.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소나무껍질)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무·새우)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음식 시(詩)의 걸작 ‘국수’에도 가족의 훈훈한 체온과 숨결이 넘친다. 어머니가 동치미 국물을 뜨러 가고, 부엌에서 국수틀로 국수를 뽑고, 냉면을 사발에 말아 내오자 겨울밤 따끈한 아랫목에서 받아들고 찬미한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고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식초)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아랫목)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적경(寂境)’은 음식에 밴 가족애(家族愛)의 절정이다. 몸 푼 며느리를 위해 늙은 홀아비 시아버지가 없는 시어머니 대신 산국을 끓인다. ‘신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오는 아츰/ 나어린 안해는 첫아들을 낳었다// 인가(人家) 멀은 산중(山中)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는다// 컴컴한 부엌에서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올여름엔 비가 유난히도 질기게 왔다. 서울만 해도 8월 중순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퍼부었다. 그렇게 비 오는 여름날 어둑한 오후, 괜히 입이 궁금할 때면 저마다 비슷하게 떠올리는 기억이 있다.

 

하굣길에 잔뜩 젖어 집에 오면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힌 뒤 군불을 살짝 때 보송보송한 아랫목에 몸을 묻게 했다. 함석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아스라이 잦아들며 마악 잠에 빠지려는데 기름내가 코끝을 간질인다. 뭔가 지글거리는 소리가 빗소리 같기도 하다. 어머니가 부침개를 지지고 계셨다. 장마철 주전부리로는 부추전, 김치전, 장떡이 만만했고 호박전, 감자부침도 맞춤이었다. 어머니가 돼지비계나 콩기름 두른 번철(燔鐵)에 부쳐내기 무섭게 자식들 차지였다.

 

장마 뒤로도 게릴라성 호우라는 게 하고한 날 쏟아지면서 부침개 지져먹는 재료들이 부쩍 잘 팔렸다고 한다. 한 대형 할인점에선 작년 여름보다 식용유는 56%, 밀가루는 33%나 매출이 늘었다. 기상학자는 궂은 날엔 냄새들이 저기압에 갇혀 맴돌기 때문에 부침개 지지는 냄새가 유난히 고소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영양학자는 옛 어른의 삶의 지혜를 본다. 체온이 떨어져 차고 물기 많은 음식을 멀리하게 되는 장마철엔 고소한 기름냄새가 식욕을 자극하고 제철 채소를 섭취할 수 있는 부침개가 제격이라고 한다.

 

부침개 맛은 그런 과학적 인식을 초월한다. 거기엔 어김없이 어머니에 대한 옛 기억이 조건반사처럼 엮여 있다. 그 시절 어머니들이 파, 부추, 호박을 뒤란의 텃밭에서 따왔듯, 오늘 젊은 어머니들은 냉장고 속 자투리 채소와 신김치로 전을 부친다. 정취 어린 옛것이 맥없이 단절되고 사라져버리는 세상에서 드물게 신통한 일이다. 음식은 모성이고 모성은 우리네 맛의 뿌리라는 걸 비오는 날 부침개에서 실감한다. 우리는 몸 깊숙이 육화(肉化)한 추억의 음식을 맛볼 때마다 그 변치 않는 어머니의 체취를 맡으며 안도한다.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