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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김영갑] 사진에 미쳐… 제주에 미쳐

세칸 2007. 11. 23. 19:51

[사진가 김영갑] 사진에 미쳐… 제주에 미쳐…

제주=글·사진 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입력 : 2005.03.17 17:24 / 수정 : 2005.03.20 15:06

 

 

 얼굴근육이 마비된 김영갑, 혼신을 다해 웃었다.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눈을 뜬다. 서로를 짓이겨 엄지만하게 몸 불린 눈송이들이 대지를 휘감는다. 귀를 연다. 바람을 만난 눈보라가 숨가쁘게 억새밭을 삼켜댄다. 한숨 뱉고 다시 고개 드니 이번에는 마른 바람이 눈구름을 몰아내고 쪽빛 물감을 풀어놓는다. “이게 바로 제주여.” 사내가 힘겹게 입을 뗐다. “바람 부는가 싶으면 햇살이 고개 내밀고 파란 하늘 보일락 하면 구름떼가 몰려오지. 이 맛에 내가 홀린 게야.”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입 주위 근육이 씰룩씰룩대며 얼굴 가득 파장을 일으키더니, 급기야 사내는 고통이 다발째 묻은 쓴 기침을 쏟아낸다.

 

사진가 김영갑(48). 사진에 미쳤고, 제주에 미친 사내다. 1982년 처음 제주도에 발을 디뎠다가 첫눈에 반해 버렸다. 서울로 돌아갔지만 짝사랑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아니, 날이 갈수록 열병을 앓았다. 결국 3년 만에 짐 싸들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제주에 내려와 꼬박 20년을 살았다. 스무해 세얼, 지독했다. 함께 살고 싶다던 사랑하는 여인도 뿌리쳤고 부모 형제와의 연도 끊었다. “완벽한 백지 상태에서 제주를 받아들이고 싶었어. 절대 자유인이 되고팠지. 부질없다는 걸 알았지만….”

 

가난했다. 라면이 떨어지면 냉수 한 사발로 배 채웠다. 들판에서 뒹굴다 조랑말 먹으라고 밭주인이 던져둔 당근도 씹어먹었다. 굶주림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필름과 인화지가 바닥나면 삶을 지탱하고 있던 뿌리가 뽑힌 것 같았다. 미친 사람처럼 잠 못 이루며 초원으로 바다로 서성댔다. “저 자연의 황홀경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하는 괴로움, 말로 못해. 눈으로 찍었어. 그리고 마음에다 인화했지.”

 

 

 무지개가 걸린 아끈다랑쉬오름-김영갑 作

 

태풍이 불어닥치면 바다로 나갔다. 토박이들은 집안에 꼭꼭 숨었지만 ‘뭍엣것’(스무해를 살았건만 제주사람들은 그들의 영역에 그를 포함시키지 않았다)은 바위에 몸을 칭칭 감고 벼랑 끝에 서서 태풍을 찍었다. 사람들은 ‘미친 놈’이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먼저 ‘미친 놈이라서…’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미친 놈처럼 보이느냐, 진짜 미친 놈이냐. 무의미했다. 외로우면 사진에 더 몰두했다. 낮이면 중산간(한라산 정상과 해안가를 뺀 제주의 중간 지대) 오름을 뛰어다니며 셔터를 눌러댔다. 밤에는 필름을 들여다보며 황홀해 했다. 비 오는 날에는 구름과 놀고, 맑은 날에는 꽃향기에 취해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흐린 날이면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 풀잎들 속삭임에 귀기울였고, 바람 불면 돌담에 웅크려 돌 틈새 뿌리박고 사는 생명들과 재잘거렸다.

 

외로움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걷잡을 수 없는 우울이 밀려온다. 그럴 땐 바느질을 한다. 상가집 다니면서 노인들한테 얻어온 삼베 조각을 꺼내 한 땀 한 땀 잇다 보면, 쓸모짝 없던 조각들이 쓸만한 옷이 되고 우울함은 설레임으로 변해 있다. “요즘도 가끔 바느질 하시나요?” …! 실수였다. “이 몸 갖고 어떻게 해. 숟가락도 못 뜨는데….” 앙상하게 말라붙은 손을 내밀었다.

 

김영갑은 아프다. 그것도 ‘유통기한’을 선고받은 몸이다. “1999년쯤이었어. 삼각대 나사를 푸는데 손목 힘이 탁 풀려 버리는거야. 몸을 그렇게 굴렸으니 아플만도 하다 했지.” 4년 전 원인이 나왔다. 근육이 오그라들며 온몸이 장작처럼 굳어버리는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 가혹한 천형(天刑)이었다. 제주에 대한 짝사랑이 마음의 열병으로, 마음의 열병은 몸의 불치병으로 전이됐다. “폭풍치는 밤에 망망대해에 떨어진 느낌이었어. 50년 내다보고 작업했는데 절반도 못 채우고 마감해야 한다는 데!” 고통은 심해갔다. 조그만 돌에 걸려도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벨트 풀기, 양치질조차 힘에 부친다.

 

조용히 물었다. 사진 못 찍어 금단현상은 없냐고. “어휴, 말도 마. 이런 날은 미치지.” 눈보라가 창을 때린다. “20년 짝사랑을 이제서야 받아주며 제 모습을 한 꺼풀씩 벗어보여주고 있는데 그걸 못 담으니 안타까워. 마음으로만 사진 찍을 수밖에.” 가난한 시절 마음에 풍경을 찍었던 김영갑, 또다시 마음에 사진을 찍는다. 찍는 걸 못하니 찍어놓은 걸 보고 함께 나누는 일이라도 해야 했다.

 

2002년 삼달리 초등학교 폐교를 빌려 갤러리 ‘두모악(한라산의 옛이름)’을 열었다. 직접 공사감독을 했다. “주위에서 죽지 못해 안달이냐고 말렸지. 제발 그만두라고 눈물로 편지 쓴 놈도 있었어. 그래도 행복했어.” 담배를 문다. 그 몸에 웬 담배, 팔을 뻗어 뺏고 싶었다. “다른 사람 도움 없이 내 힘으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야. 이건 포기 못하지.” 힘이 없어 죽조차도 제자가 떠먹여준다. 종이컵 속에 맥없이 타들어간 담배꽁초, 죄다 슬림형이다. 몸의 병만 아니었으면 굵은 시가를 뻑뻑 피워댔을 법한 그다.

 

“이제 마흔여덟밖에 안됐다” 하니, “벌써 마흔여덟”이라 한다. 자기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나래도 못 펴고 세상을 등진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고, 거기에 비하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던 자기는 행복한 사람 아니냐고. “몸은 부자유스러워도 정신은 한없이 자유로워. 아마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오름 하나 이해하지 못하면서 조급해 하고 있을거야.”

 

사무실 한쪽에 붙어 있는 10년 전 흑백사진 속, 젊고 건장한 김영갑이 반대편 의자에 힘없이 기대앉아 죽음을 담담히 합리화하고 있는 김영갑을 내려다보고 있다. 평생을 사진에 바친, 그것도 한 치의 일탈도 없이 렌즈만을 바라보고 산 대가(大家) 앞에 어설프게 디지털 카메라를 꺼냈다. 손이 떨린다. 앵글이 흔들린다. 렌즈에 담기엔 너무나 버거운 존재다. “기자 양반, 시간 나면 다시 들려. 아무래도 사진 찍는 거 좀 가르쳐야겠어.” 얼굴 근육이 마비되고 나서 제일 힘든게 웃는 일이라면서도 애써 웃는다.

 

들판에 다시 설 그날을 위해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갤러리 마당에서 걸음마를 연습 중이다. 그가 몸을 뒤튼다. 턱을 괴고 있던 손과 포갰던 다리 위치를 바꾼다. 목 가눌 힘도 없는 사람을 벌써 2시간째 고문 중이다. “원래 30분도 못 앉아 있어. 이렇게 인터뷰하는 거 처음이야. 오늘은 말 많이 하려 진통제 먹고 나왔어.” “운명이라 받아들이나요?” “음, 기자 양반이나 나나 지금 이 순간 내일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차이라면 당신의 내일이 올 가능성이 99%라면 내 것은 1%뿐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나는 더 치열하게 살아야지.” 그 말에 내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목이 메여서, 내가 울었다.

 

24일부터 서울 전시회 3월 24일부터 4월 5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신관 전시실에서 김영갑 사진전 ‘내가 본 이어도, 3: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이 열린다. 제주의 숨결이, 그리고 촛불처럼 사그라져 가고 있는 작가의 혼이 담긴 작품 100여점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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