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절터로 떠나는 시간여행 폐사지를 찾아서
길 따라 문화재 따라
흘러간 시간들이 화석처럼 굳어진 공간. 사람이 떠난 빈 터에서 옛 절집의 흔적을 마주하는 일은 박물관을 돌아보는 여정과는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의 풍파 속에서 수천 년 세월을 지내온 문화유산들과 터 곳곳에 남겨진 옛사람들의 자취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도 삶의 흔적들은 남아, 닿지 않을 것 같은 옛 시간과 오늘의 시간을 이어주는데 그 적막한 공간 속에서 훈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시간을 거슬러 만나게 되는 사람과 사람의 교감 때문이리라. 강산의 언저리에서 무수한 세월을 이고 서있는 아름다운 유적들을 만나러 옛 절터로 떠나본다.
감은사지 - 신문왕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지어진 사찰
백제군의 영혼이 서린 옛 절터 _ 성주사지
휴식기에 접어든 대천 바다와 서편 들녘은 휑휑하다. 여름의 들은 푸르고 해안자락은 북적거렸으나 한철을 더 넘어 다다른 겨울 보령은 감당하기 힘든 바람으로 가득하다. 보령시내를 조망하는 옥마산을 지나며 길은 산자락으로 접어든다. 바닷바람이 닿지 않는 산길의 겨울 정취는 한결 아늑해진다. 미산면 성주리. 이곳에는 사적 제307호로 지정된 옛 절터 ‘성주사지’가 있다. 성주사는 599년, 백제 법왕이 왕자시절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었다. 창건 당시 이름은 ‘오합사’였으며 백제 왕실에서 애지중지하던 사찰이었다. 왕실과의 끈끈한 인연 탓일까? 이곳에는 백제의 패망과 관련한 불우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 15년 5월에 “흰말이 오합사에 들어와 크게 울며 사원을 돌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망하기 몇 해 전부터는 나라 곳곳에서 괴이한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왕실에서 아끼던 사찰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무튼 그로부터 몇 해 만에 백제는 망하고 말았다. 오합사가 성주사가 된 것은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한참 후의 일이다. 당대의 명망 높던 무념국사가 이 절에 머무를 때였는데 당시 절의 규모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전각의 수는 1,000여 개에 이르렀으며 머무는 승려의 숫자가 2,000여 명에 다다랐다고 한다. 끼니 때 수도승들이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성주천을 따라 십 리나 흘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번성했던 성주사는 현재 쓸쓸히 폐사지로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너른 절터에는 국보 제8호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와 네 기의 석탑이 남아있다.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는 무염대사의 부도비로 신라 명문장가인 최치원의 글이 적혀있다.
한편 보통의 사찰 탑들은 주요 전각 앞에 하나씩 놓이게 되는데 석탑 네 기가 놓여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높이가 6.6m인 오층석탑을 필두로 서로 닮은 삼층석탑 세 기가 나란히 서있다. 지붕돌 끝이 살짝 들어 올려진 경쾌한 모습이나 2층기단 위에 몸돌을 얹은 모습이 전형적인 신라탑의 모양새다. 오층석탑은 보물 제19호, 삼층석탑 중 서탑은 보물 제47호, 중앙탑은 보물 제20호로 각각 지정되어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제86호)
잠들지 않는 바다_감포 대왕암과 이견대, 감은사지
감포의 새벽은 경건하다. 동이 트기 전, 대부분의 동해안 여느 바다처럼 일출을 보려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어느 누구도 쉬이 들뜨지 않는다. 독특한 것은 해안 군데군데 누군가 켜놓은 작은 촛불들과 새벽기도를 나선 만신들의 모습이다. 예사롭지 않은 이 풍경들은 해안에서 200m 남짓 떨어진 검고 긴 바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사적 제158호로 지정된 이 바위의 이름은 ‘대왕암’이다.
서기 668년, 부왕시대의 백제 정벌에 이어 고구려마저 정벌한 신라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국토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동쪽 해안으로 왜구의 침범까지 빈번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이었다.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이 곳 대왕암 바위에 뿌려졌다.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은 대왕암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견대(사적 제159호) 주변에 종종 모습을 나타냈고 그의 아들 신문왕은 이곳에서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만파식적을 얻었다. 통일전쟁과 잦은 외침으로 7세기의 국토는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땅이었다. 세상의 모든 풍파를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 만파식적은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이 아들에게 전해주는 살육의 종말을 고하는 선물이었다.
대왕암이 있는 해안을 뒤로하고 929번 도로를 따라 500m쯤 가다보면 우측으로 잘생긴 두 개의 탑이 모습을 나타낸다. 지금은 탑과 터만 남은 이곳은 사적 제31호 ‘감은사지’다. 문무왕은 대왕암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명당터에 절을 지어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절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이듬해 아들 신문왕에 이르러 마침내 절은 완공되었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의미로 신문왕은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감은사지에서는 두 가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너른 양북면 들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두 개의 탑이다. 얼핏 보기에도 장중하면서 세련되어 보이지만 이곳저곳 다니며 많은 탑들을 보다보면 이 탑이 얼마나 잘생긴 탑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두 기의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하나는 금당(불전)의 바닥구조다. 특이하게도 불전 밑으로 빈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신문왕의 효심이 만든 독특한 공간이다.
굴산사지 부도(보물 제 85호)
고즈넉한 옛 절터 _ 굴산사지와 신복사지
강릉과 명주, 양양군 일대에는 유난히 많은 폐사지들이 있다. 굴산사지, 신복사지, 한송사지, 선림원지, 진전사지 등인데 아쉽게도 이 사찰들이 왜 폐사가 되었는지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산세를 배경으로 곳곳에 숨겨져 있는 폐사지들을 둘러보노라면 이곳의 자연과 어우러진 고고한 옛 정취들을 느껴볼 수 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강릉 외곽의 구정면 넓은 들녘에 위치해 있다. 주변의 산세와 들의 풍경이 이 당간지주를 위한 배경화면에 지나지 않은가 하는 착각이 일 정도로 자연과 동화된 모습이 일품이다. 굴산사는 신라 말 문성왕 9년(847년) 창건된 사찰인데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본산으로 유명하다. 온전한 사찰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당시엔 강릉 일대에서 가장 큰 사찰로 반경이 300m에 이르렀으며 머물던 승려가 200여 명에 다다랐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당간지주(보물 제86호)와 부도(보물 제85호) 등 두 점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보존되어있다. 신복사지는 야산으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아늑한 절터이다. 굴산사지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은 절터였음을 알 수 있는데 삼층석탑(보물 제87호)을 바라보고 있는 석불좌상(보물 제84호)의 표정이 흥미롭다. 지그시 치켜 올라간 감은 두 눈과 조막한 입술의 모양이 여염집 아낙 같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복스럽고 후덕한 인상을 하고 있다. 이처럼 제각각인 돌조각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옛사람들의 정감어린 모습을 유추해보는 것도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쏠쏠한 감동일 것이다.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
산능선이 아늑한 자락에 위치한 보원사지
너른 절터를 홀로 지키고 있는 석인상
소탈한 마애불의 미소와 보원사지, 개심사 홍송 숲, 심검당의 단아한 자연미가 그러하고 너른 내포평야와 서해의 유난히도 붉은 낙조가 찾는 이의 마음을 다감하게 감싸 앉는다. 어느 여행길이 그렇지 아니하랴마는 사람들 풋풋한 인심이 좋고 자연과 유적들의 조화로움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유적을 찾는 서산 여정은 먼저 용현리로부터 시작된다. 가야산과 상왕산 자락에 휩싸인 작은 산골마을. 용현리에는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마애불이 있다. 마애불로부터 용현리 계곡을 따라 1km 가량 들어가다 보면 이번엔 너른 절터가 나타난다. 보원사지이다.
한때는 꽤나 번성했던 사찰이라는데 건물은 오간데 없고 석조물만 곳곳에 덩그러니 남아있다. 당간지주와 석조, 오층석탑과 법인국사 부도, 부도비가 그것이다.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폐사지란 말이 왠지 흉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에서 느껴지는 폐사지의 모습은 너무도 훈훈하며 푸근하다. 보원사는 한때 고란사로 불려 지기도 했으며 서산마애삼존불의 원찰이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전해져오지 않는다. 다만 이곳 가야산 일대에 아흔아홉 개의 절이 있었는데 백 번째 사찰인 백암사가 들어서자 모두 불이 나서 사라졌다는 이야기만 전설처럼 전해져 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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