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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시장을 몰고 다니는 ‘마이더스의 손’

세칸 2007. 8. 15. 23:54
新 시장을 몰고 다니는 ‘마이더스의 손’
신일프레임 노상철 대표이사

Image_View액자업계에서 신일프레임 노상철 대표이사는 ‘마이더스의 손’이다. 그가 시작하는 사업은 어김없이 다음 번 시장 트렌드의 핵이 됐다. 36년 전 액자사업을 시작하면서 벌써 여러 번 확인된 사실이다. 그래서 노 대표이사가 하는 것이라면 업계서는 마치 ‘신 시장 개척의 지침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런칭 1년 만에 200%라는 신화적인 매출신장률을 보인 가장 최근의 인테리어 사업 ‘프레임미가’가 또한 그러하다. 액자와 인테리어 몰딩은 한 끗 차이다. 테두리에서 그림을 돋보이게 하느냐 공간을 돋보이게 하느냐의 문제일 뿐.

프레임미가의 탄생배경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MBC건축박람회에서 폐스티로폼으로 만든 액자를 선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을지로 건자재 상들이 벽에 응용할 요량으로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노상철 대표이사는 본격적으로 인테리어 전용 몰딩개발에 들어갔다. 그리고 2006년 초에 개최된 경향하우징페어에서 첫 선을 보였다.

전시회에서는 부스비용보다 설치비용에 더 많이 투자해, 상품의 컨셉과 활용도가 충분히 소비자에게 전달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고급스러움과 독창적인 스타일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더욱 몰딩과 직접적인 인테리어 연관성을 갖는 벽지 디자인 트렌드가 최근 2~3년 새 장식성이 상당히 강한 회화적 요소를 풍부하게 갖고 있어, 상황은 요철처럼 잘 들어맞았다.

“우리가 기존시장에는 없는 앞선 몰딩 디자인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해외 유수의 액자업체들과 오랫동안 일해 왔기 때문입니다. 액자를 수출하면서 그들의 첨단 디자인 감각을 받아들일 기회가 많았고, 이렇게 쌓인 노하우가 몰딩 디자인에 반영된 것입니다.” 
기존 액자생산라인을 활용했기 때문에 특별한 투자비용은 발생하지 않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회사매출을 껑충 뛰게 한 셈. 현재 프레임미가는 이 회사 매출의 40~5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 회사의 연간매출이 약 130억 원 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적지 않은 액수다. 지난 1년 여간 전용 커팅기와 접착제를 개발하고, 재고를 보유하며 지속적인 신상품을 출시하는 등 소비자뿐 아니라 시공자까지 만족시켜야하는 건축인테리어 자재시장의 성질도 이미 파악하고, 현재는 또 다른 인테리어 관련 상품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노상철 대표이사의 삶은 액자인생이다. 전남 함평의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2004년 100억 원 대의 매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중견 액자제조업체의 대표이사가 되기까지는 한 인간의 성공 스토리를 보는 듯하다. 시야를 넓혀 흐름을 읽되,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선택과 집중’이 오늘 날의 그를 있게 했다.
“다른 사업가들보다도 해외출장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액자 등 관련 전시회만  찾아다니지 않고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분야도 다양하게 접하고 있습니다. 사업 아이디어는 내 분야만을 득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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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딩 부문 약 60억 원 매출, 차기 상품은?
그가 액자사업을 시작한 것은 1971년 21세 때. 당시 신일상사라는 이름으로 목재액자제조와 함께 서울시내 전 지역의 공중전화박스 유리를 갈아 끼우는 일을 병행했다. 시위가 많았던 때라 공중전화박스로 벌어들인 금액은 연간 5억 원 이상이었다. 그러나 경쟁 입찰 등으로 매출이 떨어지자 과감히 사업을 접는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노상철 대표이사가 선택한 것은 알루미늄 액자였다. 목재로 만들던 액자시장이 알루미늄으로 소재가 교체되기 시작했던 것.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로 액자시장은 컸다. 주문량이 늘어 밤 12시를 넘기는 것은 물론 주말에까지 일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때 번 돈으로 파주시 장곡리에 1억2000만 원을 들여 공장부지 2040㎡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우후죽순 알루미늄 액자공장이 생겨나면서 시장은 경쟁이 치열해졌다. 초창기 4곳이던 업체가 20여 개로 늘었고, 파는 만큼 적자를 봤다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노 대표이사가 알루미늄 액자 다음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폐스티로폼을 재활용한 액자였다. 소재를 바꾸는 모험을 단행했을 때 주위에서는 ‘사업성이 없다’며 반대했다. 스티로폼을 소재로 한 액자는 영국에서 세계시장을 평정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영국은 신일처럼 폐스티로폼을 활용한 것이 아닌 신재를 가지고 제작했다. 쓰레기 분리수거가 정착된 국내에서 신일은 그들보다 자재확보 부문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노 대표이사는 생산설비를 새로 들이고 1993년부터 폐스티로폼으로 만든 액자를 시장에 출시하기 시작했다. 깔끔한 디자인에 다양한 색상 등으로 매년 20%의 신장이 있을 만큼 시장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러한 폐스티로폼 액자에 찬물을 끼얹는 불청객은 IMF였다. 6억 원의 부도를 내고 환율급등으로 외화대출액은 15억 원으로 두 배나 늘었다. 거래처가 1/3로 줄면서 매출도 급감했다. 중소기업회생자금 2억 원의 지원금도 신용미달로 은행에서 회수해갔다. 그러나 노상철 대표이사는 여기서 또 한 번의 재기를 맞본다. 바로 해외시장에 눈을 돌린 것.

“원화 값이 떨어져 국내에서의 액자 값이 870원이라면 외국에서는 1400원에서 팔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현재 신일프레임 수출국은 유럽, 북미, 중동 등 50여 개국. 더욱 그 첫 시도가 아르바이트를 통한 해외시장 진출이었다는 것을 비춰보면 그의 사업수완은 타고난 듯하다. 노 대표이사는 “아마 액자분야에서 이처럼 많은 국가에 수출하는 기업은 세계에서도 유일할 것”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쯤 되면 진정 프레임미가의 차기상품이 기대되는 순간이다. 신일프레임에 있어 프레임미가의 성공적 안착은 건축인테리어 자재라는 또 다른 시장의 물꼬를 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요즘 신일프레임은 스타일이 좋은 인테리어에서 끝나지 않고, 참숯을 첨가해 특허를 획득하고, 음이온이 발생하는 몰딩도 개발을 완료하고 출시를 목전에 두고 있는 등 시장선점 상품개발에 여념이 없다. 향후에는 목분을 섞은 몰딩도 출시할 계획으로, 2010년도에는 인테리어 분야의 매출성장에 힘입어 연 300억 원의 매출발생이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국목재신문  장영남 기자 chang@woodkore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