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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온돌)의 역사

세칸 2007. 8. 15. 02:33

구들(온돌)의 역사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난방 방식인 그들의 따뜻한 아랫목은 온가족이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자리였다. 침대 생활을 하는 외국인의 눈에는 그런 아랫목 문화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1904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한국 사람들은 밤마다 펄펄 끓는 방바닥에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게 아주 습관이 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구들은 방의 바닥을 구성하는 구조체인 동시에 난방을 위한 시설. 바닥을 구성하는 구조체에는 구들과 마루가 있다. 마루는 난방적 요소가 짙은 것으로 남쪽지방에서 발전하여 북쪽지방으로 퍼진 반면에 구들은 추운 북쪽지방에서 발달하여 차츰 남쪽지방으로 보급된 것으로 한옥에 정착되기 이전에는 제각기 형성되었던 이질적 건축시설이다.

구들은 방바닥을 골고루 덥게 해주고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여 기거하기에 적합하도록 하며 화재에도 안전한 이상적인 채난법인 방바닥 축조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내공기가 지나치게 건조되기 쉽고 불을 떼지 않는 여름에는 바닥의 습기가 상승하여 눅눅하게 되는 결점이 있으며, 구들을 잘 놓지 못하면 불길이 아궁이 밖으로 나오거나 견열이 생겨 연기가 누출될 우려가 있다.

 

역사

우리 나라에서 구들이 언제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함경북도 웅기지방의 청동기시대 움집에서 발견된 구들의 흔적을 예로 들기도 하지만, 아직은 불확실한 단계의 자료일 뿐이다. 그러나 그때 구들의 구조법이 시험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중국 문헌 <구당서>에 "고구려인들은 겨울에 구덩이를 길게 파고 밑에서 불을 때서 따뜻함을 유지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구들을 중국에는 없는 고구려적인 특색으로 표현한다.

백제에 관한 기록에는 구들에 관한 기록이 없고 다락집이 있어 거기에서 기거한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백제는 남방주거형식의 특색을 보이고, 고구려은 청동기시대 이래의 북방주거의 특색을 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조령원구기의 발굴조사 때 고려시대의 건물터에서 구들고래의 시설이 발견되어, 고려시대에는 이미 구들이 소백산맥의 남쪽지역에까지 설치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북방의 구들이 그만큼 남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조선초기에 들어와서는 구들이 조령을 넘어 남부지방으로 남하하고 있는 사실을 여러 기록에서 밝혀주고 있다. 즉 선산, 상주, 안동 등지의 관아와 궁실에 관계되는 건축물들이 보수되거나 신축된 사실을 기록한 초중창 중수기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시설을 구비하였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이것은 구들의 전파가 분명히 남부지방에까지 이루어졌음을 보이는 내용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구들의 전파는 북방, 즉 한양에서 파견되는 관리들을 위하여 지어진 건물에 먼저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뒤에 백성에까지 보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구들전파의 예는 제주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15세기 말엽에 벼슬한 제주 출신의 고득종이 기록한 '홍화각중수기'에는 구들을 서쪽방에 설치했다지만 비슷한 식의 사항을 기록하였다고 인정되는 '동국여지승람'에는 "백성들의 집에는 아궁이와 구들이 없어 땅바닥에서 잔다"고 되어 있다.


또한 17세기 후반에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형상의 '남환박물지'에도 제주도 민가에는 구들이 없다고 되어 있다. 이익도 같은 기록을 하면서 이익이 살고 있었던 시절에 제주도 민가에 비로소 방 하나 정도에 구들 시설이 존재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백성들의 집에 구들이 보급되기 1-2세기 전에 관리들의 집에는 구들이 설치되었던 것이므로 선산지방일대의 경우도 관리들에 의하여 선도되고 백성들에게 보급된 것은 그보다 뒤졌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중앙관리가 향리에 돌아와 사는 집이나 궁실에 연관된 사찰 등에는 구들 놓은 방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구들은 병을 치료하는 시설로 활용되기도 하고, 노인들을 위한 시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 한방 치려법 가운데 '두한족열'이라고 해서 발을 덥게 하고 머리를 차게 하면 건강해진다는 말이 있는데, 선조들은 일찍부터 차가운 윗목에 머리를,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두고 자는 지혜로움을 발휘했다. 옛날에는 며느리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며느리가 지어 오는 밥상의 훈기를 척도로 삼았다.

그래서 며느리들은 밥이나 국, 찌개, 숭늉을 알맞은 온도로 올려야 했는데, 법도 있는 집에서는 그 기준을 "아랫목 더위를 조금 밑돌거나 윗돌아도 나쁘다"고 가르쳤다. 그러기에 뜨거운 밥은 미리 퍼서 아랫목에 묻어 두었고, 뜨거운 국은 뜨뜻한 부뚜막에 올려 온도를 낮추었다가 상에 올리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집들은 서구식 공기 난방으로 바뀌고 있다.


종류 및 구조

구들의 종류는 불아궁(부뚜막), 고래의 형식, 축조재료, 연료, 굴뚝 및 구들 고래의 형식 등에 따라 나눌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래의 형식이다. 고래의 형식에 따른 유형으로는 선자구들, 쇠구들, 토관구들 등이 있다.


구들은 불아궁이, 구들고래(방고래), 개자리, 연도, 굴뚝의 각 부분으로 구성되며 모두 불연재로 축조되어야 한다. 불아궁과 굴뚝의 배치는 한 방의 주위벽에서 서로 먼 위치에 두는 것이 효과적이고 구들과 굴뚝을 연결하는 연도는 될 수 있는대로 짧게 하는 것이 좋다.
불아궁과 굴뚝연도까지 도랑 모양으로 축조하고, 그 위에 구들장을 덮어 연기가 흘러나가게 만든 것을 구들고래 또는 방고래라고 하며, 고래 옆에 쌓아 구들장을 받히는 것을 두둑이라고 한다. 굴뚝이 있는 벽과 평행으로 깊게 파낸 고래를 개자리라고 한다.


개자리는 구들고래가 끝나는 주위의 벽과 고막이 안에 깊게 만든 고래로서 대개 불아궁의 반대편 벽쪽에 만든다. 굴뚝 밑에 깊게 만든 곳은 굴뚝개자리라고 한다. 고래는 아궁불목에서 가장 낮게 되고 방의 갓둘레 개자리 부근에서 가장 높게 되므로 고래를 켤 지면은 그 경사에 맞게 고르게 다져야 한다. 지면을 계획한 고래의 형태로 파낸 다음 옆에 두둑을 쌓은 일을 고래켜기라 한다. 고래의 깊이와 너비는 방의 크기와 아궁이와 굴뚝의 거리 또는 구들장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고래에는 나란히고래, 허튼고래, 선자고래 등이 있다. 나란히고래는 고래와 두둑의 너비를 거의 일정하게 평행으로 만든 것이고 선자고래는 부채살처럼 된 것으로 불목에서는 좁고 개자리족에서는 넓어진 형태이다. 허튼고래는 불목에서 개자리쪽으로 연기가 흘러들기 좋도록 땅바닥에 경사면을 만들어 다진 다음, 두둑을 쌓지 않고 구들장의 네귀가 올라 앉을 동바리돌 또는 벽돌을 쌓아 만든다. 따라서 허튼고래에 쓰이는 구들장은 일정한 크기의 네모난 것이어야 동바리들을 가로 세로 정렬로 배치할 수 있다.

 

 


출처 : http://my.netian.com/%7Einri2001/common/gudul.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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