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 - 詩 : 정덕수, 작곡 : 하덕규, 노래 : 하덕규(노래)
한계령 - 詩 : 정덕수, 작곡 : 하덕규, 노래 : 하덕규(낭독/낭독의 발견 2004년6월2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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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덕수 연작시 '한계령에서'
한계령에서 1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메일지.
삼만육천오백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메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 1981년 10월 3일 한계령에서 고향 오색을 보며
▲ 한계령 입구
한계령에서 2
- 타인의 노래가 되어버린
봄엔 산철쭉
가을엔 단풍이 이 마을
이름처럼 고운
산으로 둘러싸인 오색리
마을 터 잡이 목수셨던
아버지 지으신 절집
뒤 곁에 걸린 승복 두어 벌
어머니 손짓인 듯 정겨운데
아 그러나 그곳은
눈 속에 피는 꽃
얼레지꽃잎처럼
신비로운 내음
까닭 모를 애증
운율도
음율도 맞지 않은 가슴 속 시어처럼
엷은 구름 떠가는
하늘 닿은 한계령
흙먼지 뿌연 추억은 바람 따라 날아가고
유년의 미끄럼틀처럼
헉헉이며 올라온 차량들이
매끈한 아스팔트 위를
신바람 난 아이들처럼 내달리는데
삼천 육백 쉰 날 지난 뒤
무슨 생각할까
또 어떤 이야기를 할까
한계령에서.
한계령에서 3
- 낙엽 떨어지던 저 능선에 진달래 피며는
내 살과 뼈를 발라 쓰는 이야기 여기서 마지막이 아니기를
이미 나는 내 삶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그리웠던 그대로, 즐거웠던 그대로가 아닌
아픔만이 내 영혼을 휘감고 사탄의 속삭임을 듣는다
내가 아니었다
그대 또한 아니었다
내 슬픔은 나만의 슬픔인 채 추억 속에 묻힐 테고
아, 나는 모든 내 주변의 내 것들을 부수고 있구나
파괴!
오가피나무 가시가 손톱을 휘저어
마치 날카로운 메스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심장을 휘저어 주기를…
그렇다. 차라리 절대 불가항력의 상태에서
오장육부를 발라내어 내 눈 앞에 던져 주기를 나는 바라며 살았다
굶주린 짐승의 이빨로 발라낸 살점이 퍼득이며 먹히는 그 찰나
나는, 죽기를 바란다
인간의 감성 사이에 놀아나는 내가 아닌 차라리
짐승이 되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희생 되기를…
밤 깊고 비 오는데
눈물 고인 눈 들어 바라보는
술잔 속 그리운 고향 영마루 어리고
시간이 녹아 떨어지고 있구나
아름답고
그 아름다운 시간 속
안타까운 생명 명멸하고 있구나
아~,
나도 이제 저 꺼져가는 생명체 중 하나
오늘 나는 작별을 말해야 하는가
안타깝고
안타까운 뜬 구름 세상
세상사 바람 같은 꿈이었구나
담배 연기 사이 떠 오르는
그 산길 바람 불고 비 오는데
가슴에 못다 한 말
묻어두고 가야 하려나
아이처럼 흐느끼며 가야 하려나
광폭한 비바람 불어
곱던 꽃잎 지는구나
꽃 찾아 날아들던
나비야 너도 가자
저 산 고개 너머 꿈 같은 고향
망초꽃 지기 전에
도사린 뱀처럼 뒤 틀린 고갯마루 바람 불어 온다
무엇이 목적도 아니었다
이제 영혼이 없는 내 육신을 그대는 보리라
넋 나간 자의 차가운 언어를 그대는 들으리라
이제 그대는 절망이 무엇인가를 알고 후회를 할지라도
어떤 속삭임도 하지 말라
나는 그대의 음성이 지식의 농짓거리로 보이니
가슴이 따뜻하지 않은 언어의 유희는 이제 그만 두기를…
낙엽이 이제 저 쓸쓸하고 앙상한 골짜기를 뒤덮어 날리우리라
낯 선 땅 차가운 대지에 누우신 어머니의 육신에 뿌려지던 황토처럼.
비 그친 하늘가 부서진 별
오늘 내 눈을 찌르고
심장을 관통하여 집착을 버리란다
세월이 가면 푸르던 잎 낙엽 지고
세월이 가면 앙상한 가지 새 움이 튼다
말 하네
속삭이네
울음을 그쳐라
그리고 뛰어라
바람 찬 대지 박차고 달려라
아,
내가 너를 이제 알겠다
이것이 인생이다
바람으로 흘러가고
구름으로 떠 도는 것
물처럼
세월처럼
저 앞에서 달려와서
추억 한 자락 남기고 지나가는
그것이 인생이다
산목련 고운 새봄이 오면
진달래 어여쁜 그 봄이 오면
나는 가리
찾아가리
어머니 무덤가에 할미꽃 핀 자리
잔 가득 술을 부어
고맙다 감사하고,
눈물 흘려 인사하고
지나 온 세월 둥근 흔적 더듬어
잡초 사이 묻혀버린 사랑 찾아
세상으로 돌아 오리라
아,
물 같고
바람 같은 세상으로
사랑 한 아름 꺾어 들고
진달래 붉은 한계령 굽잇길
울음 던져두고.
한계령에서 4
- 미래는 알 수 없음에 가치가 있다
나무의 텍스츄어로
바위의 텍스츄어로 닮아가기를 바랐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어루만짐에 몸을 맡기고
싫은 내색 없이 새 싹이 돋고
꽃이 피고
낙엽이 지듯 살고 싶었다
천년 풍상에 아랑곳 하지 않고 제 살과 영혼 온전히 내주어
부드러운 흘림으로 모양 잡히기를…
바람은 예외 없이 불고
그 골짜기 비 오고 구름 스쳐가는 오늘도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먼 조상적부터
전설로 다듬어진 바위 여전한데
소년은 念寫 된 영혼마냥 울고 있다
진화의 목적을 상실하고
평면구도적 퇴행의 길을 가고 있는 소년
와상은하의 소용돌이에서 길을 잃었다
천 년 내리 바람 불고
억만겁 빛살같이 지나갈 인생
눈물일랑 이제는 흘리지 마라
한 잔 술
한 개피 담배 연기 속
지워질 인생이 아쉬운 것을
아,
분노에 심장 터질지라도
나무같이
바위같이 천 년 먼 후일
내 영혼 닮아가기를
꿈에라도 그려보자
바람이 불어 온다
신명나게 한 바퀴
춤 사위 허공에 던지자
겁 먹은 눈망울
슬픈가 묻더라 저 들풀이
내 뿜는 한숨에 꽃이 지잖니
신비로다
다가오는 내일 아침
구름 걷치고 해가 뜨겠지
아,
분노에 심장 터질지라도
나무같이
바위같이 천 년 먼 후일
내 영혼 닮아가기를
꿈에라도 그려보자
바람이 불어 온다
신명나게 한 바퀴
춤 사위 허공에 던지자
또아린 튼 배암도 수풀에서 해가 뜨기를 기다린다
희망은 언제나 절망을 노리고 있다
네가 스스로 이기기를
안개구름을 등지고 한 개피 담배 연기로 날려라
너에겐 아직 저만큼이나 멀리 죽음이 있잖니
그가 오기 전까진 아직 체념은 어리석지 않니
네가 누울 풀밭은 여기가 아니다
아직 저 시든 풀밭엔 알 수 없는 미래의 희망으로
들려오는 노래가 신비롭잖니
가슴을 따뜻이 하고
네 의지로 일어서 보아라
아직은 많은 날을 움도 트고 꽃도 피어나리니
처량하게 들리던
저 낮은 곡조의 노래 멎었다
꽃이 지는 날 내일을 기약하자
씨앗 하나
천 만 송이 꽃이 피겠지
나비 꿈 꾸며 날아들겠지
아,
분노에 심장 터질지라도
나무같이
바위같이 천 년 먼 후일
내 영혼 닮아가기를
꿈에라도 그려보자
바람이 불어 온다
신명나게 한 바퀴
춤 사위 허공에 던지자.
한계령에서 5
- 가을의 정적을 깨고 피는 꽃처럼.
굽이친 산 자락 한 켠 새가 날아갔다
하늘에 새가 날아갈 길 있나보다
멈추지 않는 흐름으로 철이 바뀌어
잊힐까 아득한 저 편
갈바람 전설처럼 불어 풀이 눕고
아~
그만큼만 더 그리웠으면 간절한 바램
거두어드릴 것 하나 없는 세상
어차피 버리고 가야 할 껍질 아니던가
건조한 바람 한 줄기 나무 등걸 스치고
구름 몰아 간다
주검같은 차가운 한기(寒氣) 소스라쳐 돌아본다
저 등걸 칭칭 감아 올라가는 칡넝쿨처럼
한 세상 살고 싶었는데…
한 세상 그렇게만 살고 싶었는데…
내가 부르는 노래
내가 불러야 하는 노래
육신의 껍질 훌훌 벗어놓고
달 뜨는 동편 산 자락 꽃으로 피리라
구절초 쑥부쟁이 서러운 그 꽃으로
달이 지면 목 놓아 울고
서러이 홀로
새날에 새바람 불어오는 영마루
꽃으로 피어 노래 부르리
아,
인생은 흐르는 시간 속 찰나(刹那)의 꿈
향(香) 한 촉 사룰 그 시간 있을까
시간을 어루만져 바람 분다
채 마르지도 못한 나뭇잎 떨어진다
꿈길인가
누군가 발자욱 소리 거칠게 지나갔다
두려움에 떠는 밤은 더디 가고
장닭은 잠 깊이 들었는가
새벽은 영 오지 않을까 싶은 맘
성급히 나서 본 뜨락
하늘가 몰려가는 구름
누가 벗어 놓은 옷자락인가
이승에 한(恨)이 많은 귀신형용 무리인가
아서라
나도 죽어 그리 갈 것
내, 가는 그 날
구절초 산야(山野) 가득 피워라
꽃 길 휘적휘적 걸어가
너를 만나 술잔을 나누고
짙은 담배연기 내 뿜으며
함께 너의 한(恨)을 통곡하고
내, 고달픈 애(哀)를 태우면 되는 것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오늘 내가 깨닳았다
세상에 마지막 잔 비우고
욕심없이
바램없이
잠시 일손 거두고 마실 떠난 어미처럼 가리라
가을산 붉은 단풍길 소풍가는 아이처럼 콧노래도 부르며
무엇을 두려워 하랴
내가 그곳에 찾아가
노래를 부르면 되는 것을
꽃이 지면
하얀 갈꽃이 지면
그 때 노래나 부르면 되는 것을
해가 지면
샛강에 달이 비출테요
내가 내 육신을 벗어 놓고
꽃으로 피어 노래 부르리
아,
무량하다 생각턴 인생 찰나(刹那)의 꿈
칭칭 감겨 울고픈 맘 접어두고
바람 부는 산길 넘나드는 잡초인냥
스러지리라 비감(悲感) 고이 접고
쑥부쟁이 핀 길섶
구절초를 찾아나선 아이
꿈이 많아 서러웠을 인생
육신의 껍질 훌훌 벗어놓고
달 뜨는 동편 산 자락 꽃으로 피리라
손길 닫지 못할 언덕 위 한포기 구절초로 피어
달이 지면 그리워 애 태우고
서러이 홀로
새날 맞는 아침 바람 불어오는 영마루
다시, 꽃으로 피어 기다리리
아,
내 삶은 흐르는 시간 속 찰나(刹那)의 꿈
향(香) 한 촉 사룰 그 시간 있을까
시간을 어루만져 바람 분다
채 마르지도 못한 나뭇잎 떨어진다.
한계령에서 6
- 마음보다 먼저 앞서간 발길처럼
모니터 상에 떠 오른
수 많은 단어들을 일순간 온 자취없이 지워버리는
Delete 키 같은 행동으로
세상의 보기 싫은 모습들을 지워보려 한다
세상을 신이 프로그래밍 한 파일이라면
어딘가 있지 않을까
아주 섬세하고 은근하게 파고들 헛점
바이러스를 침투시킬 수 있는 공간이…
가까이 다가가서 귀 기울이고
어딘가 전류가 통하는 연결 코드가 있지 않을까
누가 저기다 핏빛 울음 토하여 놓았는가
온통 츱츱한 설음의 빛
살아야 하는 까닭에 부질없이
헛점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건만
눈시울 가득 먹울음 피고
산정에 단풍만 곱다
온통 오류와 버그로 가득하다고 느껴진 순간
그는 어이없게도
슬쩍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내 아비, 마져 칠하지 못한 단청처럼
새빨간 단풍
설워 눈시울 붉어진다
그래, 이 길이
고향 가는 길 이랬다
발 아래 저 산굽이 흐른 자락
고향이랬다
거기 가면
숨겨진 생의 비밀 풀 수 있을까
얽힌 실타래 풀 듯 할까
전류의 공급원을 찾아내
차단시키듯 할까
말그라니 싱그러운 웃음
그치지 않을 그 날이 밝아
그때, 거기 새 울고
바람 서늘한 골짜기
맑은 물결 쉬임없이 흐르고
먹구름 사이 애 태우던 햇살
비단같은 빛살을 뿌리는데
그래!
그 골짜기 구상나무 싯푸르게 살아
동해를 바라보고
한 세월 버텨온 기다림
흔적, 아~ 흔적
겨울 재촉하는 비 뿌리는 날
수묵색 안개 젖어 울고
산죽(山竹) 키는 아직도 변함없이 고만고만 한데
산꿩 푸드덕이는 날개짓 소리
마치 세상살이에 지쳐
내, 허덕이던 몸뚱이 뒤척임인냥
그렇게 아파
젊음을 장사 지내고
이제 홀연히 천리(天理)를 따를 날 기다리네
내, 마음 풀어 둔
주전골 골짜기 맑은 물결 변함없고
망경대 끝자락 걸리 소나무 한 그루
돌아 앉은 동자바위 안스러운 눈치다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마음 넉넉히 안아 줄 것을
삐걱이는 철난간에라도 던져 둘 것을
너에 자그마한 소망 하나쯤 들어 둘 것을
점봉산 자락 휩쓸려 바람 부는 탓만 하고
오독하니 그리운 흔적 더듬다
내 손짓이나
속내 모두 부질없어 로그아웃 하고만다.
한계령에서 7
- 자욱한 안개 속에 길이 있다
종일토록 궂은 하늘을 이고 사람들과
그가 찾아왔다
온통 삭풍 울어대는
서북주릉 더듬으며
껍질 하얀 자작나무 숲 아래
풀이 누웠더라.
-공연히 한 마디
머쓱했던 탓이려니
비교 될 까닭 없는 인생인데
언어의 결핍 탓인가
늘 '무엇, 무엇을 닮았다느니…'
변절해버린 옛 연인 닮은
모진 태양이 숨은 탓이려니
아니, 설악의 바람
예까지 불은 탓일 것이야
함박꽃 흐드러지면 갈꺼나
함박꽃 빛
하얀 눈 내리면
갈꺼나
시린 칼날 육각 모서리
살 베어 입에 물고
예보다 높이 올라가면
후덕하니 고운
햇빛과 바람 부는
잉태 이전의 순수
아~,
만날 수 있을까
삭망날 지청 찾아든 망자처럼
무량한 날들이
날실로 놓이고
애별린 가슴
씨실로 짠 피륙이었다
내, 인생
언제나 손 시려운
섣달 그믐밤 이었다
더디게 가는 시계를 원망커라
뒤척이는 밤마다
적막·적막·적막
아, 그렇게 허무히 지샌
밤들로 흐른 세월이
하늘길 향한 계단 이루어
피륙에 순정한 수로 놓였다
애오라지,
설산으로만 가는
발걸음 잡아
한 사흘 묶어 두었더니
그예 몸살을 앓고
눈 앞에
화안히 밝은 설산이 보인다고
사그락이는 정육각 결정들
곱기도 하다
자꾸만 되 뇌이고
내, 어쩌랴
'지 팔잔걸.'
한계령에서 8
- 눈 오는 밤이면 그려지는 이 마음의 고향
서울에서 한계령까지 그리움으로 쌓아간 계단이 있다
령 넘어 오색 골바람 찬 날
애틋한 보라색 끈 묶은 그리움의 다발 들고
여물어 터지지 않은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려 갈 생각 하나
마음 강에 성애로 끼고 서리로 내린 날
메밀꽃 빛깔의 눈이라 올라치면
보내지 못했던 편지 뭉치 꺼내어 불을 사른다
즈믄 산자락 길 막아 눈이 왔으면
그리움 단절되어 눈이 왔으면
그 때 너의 이름 가벼이 흐느낌으로 날려 보낼 것을
부질없는 기다림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너를 노래 하는구나
끝내 당도하지 못할 편지를 쓰던 마음으로
내가 너를 노래 하는구나
적막한 산 굽이 휘돌아 오실 님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서설 내린 소식 전해 듣는 밤
수 만 가닥 바람 이어
꿈길인양 노래로 부르건만 어이하랴
그리움이 그토록 아픈 일임을 미쳐 몰랐음을
바람 불고 눈 오는 그 굽잇길
스치듯 지나 온 날이
가슴에 멍울로 남을 줄이야
궂이 함께 있기를 바랐던 사람 아니었건만
바람 부는 밤 그토록 그려지는 까닭은
바람에 던져 두고 돌아 왔어야 하는 마음인 탓에
가슴 속 깊은 우울증에 뒤척이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뜻 밖의 말들로
공허한 웃음 빈 들길에 뿌릴 때
어디 날지 못하고 뒤척이는 참새
잔기침 하나 들렸던 듯 허망히 그려보는 고향
그 마음 모두
아흔 아홉 켤레 신을 삼아 짐을 꾸릴까
그리하여 황톳길 터벅이며 걸어
아흔 아홉 켤레 신이 모두 낡으면 만나질 그리움이라면
꼭 가기로 마음 먹지 않았던 세월이 이리 흘렀다던
그 이야기 마음 속에서 꺼내 흔적 없이 지우고
'이만큼 보고싶었습니다.'
아, 한 아름 크게 팔 벌려 보이곤
시든 풀 밭 별이 지기 전
울어야 했던 사연 모두 털어 놓으련만
삶의 의욕을 상실한 시대를 사는 폐인처럼
마호가니 빛 공원 벤취에 뒹구는 낙엽위에 다시
봄으로 향한 길이 있노라
자작나무숲에 세겨 둔 서걱이는 속삭임 들리는데
무수히 많은 시간은 다시 신화가 되고
지상에 뿌려둘 시간의 부스러기 마저 신화가 되는 시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망명지로 떠나 보냈던 네가
오늘 온통 한계령 굽이에 서설로 내렸다 하여
숨 죽여 밟아가는 꿈 길이 행복할까
보내지 못했던 그 사연들을 태우고
굳게 걸은 빗장을 풀고 나서보는 밤
내 발 밑에 부서지는 시간들을 보았다
내 발 밑에 아우성치며 스러지는 신화들을 보았다.
한계령에서9
- 아무도 모른다 얼마만큼 가야 만날 수 있는지를…
먼 꿈길 속
산자락 흐르고
그 산자락 사이 물 흐르는 소리 청량한
고향으로 향하는 발길들의 부산함
고단한 날개짓
쉬어가라 붙잡는 바람
고향은 내 심상 어루만지는 바람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그 숲 속
가만히 두고 떠나온 시절
그대 흰 속살 드러낸
바람으로 머물렀는데
나는 마음에 고향을 담고
그대 넉넉히 달빛을 담아
먼 산 바라보니
절뚝거리며 살아 온 시간들
산죽밭 스치는 바람으로 울고
이만큼 왔으면
혼돈의 언저리 당도하지 않았을까
가장 먼저 나의 사랑을 보내고
농담을 할 줄 모르는 죽음, 뒤에 세우고
걸어 온 길 아스라한데
찰나의 순간이나마
불멸이기를 바랐던 때
네가 곁에 있었고
방향을 바꾸어 네가 걸어가기 전까지
꿈인 듯 달았다
그래, 거기 오렌지색 구름
보름에 가까운 달
너는 가고
이제,
나는 돌아서 웃고만 있다.
한계령에서10
- 별을 바라보면 거기 그의 모습이…
먼 꿈길 속 그는
꼭 지금처럼 하얗게 아무 말도 하지않고
꽃신 신은 발로 고갯길 올라
활~활!
꽃불 밝히웠느니
한 사흘 연이어 꽃바람 불어
남에서 북으로 꽃바람 불고
북에서 남으로 불타는
아!
불 타는 가을의 행렬 헤아릴 수 없이
오고 갔는데…
모를 일이야, 아무도
누가 보내고
누가 불렀던 가는
강요되지도
강요 받지도 않은 삶이지만
와서 가고
또 돌아오는 계절에도
오지 않는 사람 있어
조용히 불러보는데
눈 감아도 지워지지 않는
하얀 꽃 한 송이
찢어진 구름과 구름 사이
고향길 언덕배기 겨울 억새 눕던 날
더 큰 희망으로
몸을 낮추어 대지에 귀 기울여 듣느니
생강나무 가지 끝 꽃 봉우리 터지는 소리
아!
산목련 하얗게 웃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