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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왜 소설 '안중근'을 못 쓰나

세칸 2008. 4. 17. 16:19

김훈은 왜 소설 '안중근'을 못 쓰나

 

성웅 이순신의 실존적 내면을 그린 소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사진)씨는 언젠가 안중근 의사를 소설로 형상화할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김씨는 종종 《난중일기》에서 읽어낸 '인간 이순신'의 고뇌를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칼의 노래》탄생 설화가 무르익어 가던 시절 김씨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또 다른 역사적 실존 인물은 안중근이었습니다.

어느 날 가까운 문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그는 하얼빈 거사 직전 안 의사의 심리를 실감나게 묘사했습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쏘기 전에 총알 하나하나에 칼로 십자가를 그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이토를 죽이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둘째, 총알이 이토의 몸속에 박혀 십자가 형태로 파열되면서 신체 곳곳에 치명상을 안겨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형형한 눈빛을 내뿜으면서 비장하게 말한 김훈씨의 입담에 취한 문인들은 1909년 하얼빈역으로 상상 여행을 떠났습니다. "안중근은 이토의 머리에서부터 몸통, 무릎까지 정확하게 한 발씩 쐈다. 첫 발을 맞은 이토는 몸을 앞으로 숙이는 매 순간 한발씩 맞았다. 안중근의 총 솜씨는 뛰어났다."

세월이 흘러 김씨는 2001년 《칼의 노래》를 발표해 그해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2007년 100만부 판매 돌파 기록을 세웠습니다. 《현의 노래》《남한산성》등의 역사소설도 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소설 안중근을 아직 쓰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안중근은 대한제국 군인의 신분으로서 적장(敵將)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안중근을 소설로 쓰려면,이토의 내면에 대해서도 써야 그 두 사람의 전투를 제대로 조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근대화를 주도한 이토의 생과 내면에 대한 내 공부가 너무 부족하다."

인터넷 서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정면으로 다룬 책을 찾으니까 국내 학자 저서와 번역본 포함해서 3종에 지나지 않더군요. 제대로 된 안중근 평전도 찾기 힘듭니다. 우리는 민족영웅과 민족원흉 양쪽 모두 피상적 지식의 무덤에 묻어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내년이면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이 됩니다. 뮤지컬 안중근 초연과 학술 토론회 등이 열립니다. 동북아 평화를 염원했던 안 의사의 높은 뜻을 우리끼리만 기리지 말고 당시 역사를 객관적으로 깊이 성찰하는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안중근 시대에 대한 인식이 업 그레이드 된다면, 김훈씨 혹은 다른 젊은 작가가 하얼빈역의 총성을 담은 소설 《총의 노래》를 쓸 날이 오겠지요.
 

도쿄=김태훈 기자 scoop87@chosun.com

입력 : 2008.03.30 23:35 / 수정 : 2008.03.31 0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