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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명물, 구포다리 75년 역사가 사라진다

세칸 2008. 3. 19. 08:48
부산 명물, 구포다리 75년 역사가 사라진다

일제 때 물자 수탈 위해 건설…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긴 교량
태풍에 부서져 연말까지 철거… 시민들 "근대문화재로 보존을"

 

“완행버스를 타고 진주에서 부산까지 비포장 도로를 타면 6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구포다리를 넘어오면 아줌마들이 광주리에 과일을 한 바구니 담아서 ‘내 배 사이소, 내 딸(딸기) 사이소’하고 버스 창문을 두드리던 기억이 나는구만”.

지난 3월 3일 구포다리에서 만난 주민 박원영(68)씨는 구포다리를 그렇게 회상했다. 구포다리는 부산시 북구 구포동과 강서구 대저동을 잇는 다리다. 박씨는 “1950년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을 따라 경남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사 오면서 처음 구포다리를 건넜다”고 말했다.

이날 찾은 구포다리는 철거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미 상판 11개 중 9개를 걷어냈다. 상판을 모두 걷어내면 교각들도 철거하게 된다. 부산시는 올해 말까지 구포다리의 철거를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이렇게 올해로 ‘75살’인 구포다리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구포다리가 세워진 건 1933년 3월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9월 착공, 연인원 7760명이 동원돼 2년6개월 만에 완공됐다. 구포다리는 낙동강에 세워진 최초의 다리이기도 하다. 1976년 남해고속도로가 지나는 낙동강교가 생기기 전까진 경남과 부산을 이어주던 유일한 육상 교통로였다. 부산 강서구 대저동(옛 경남 김해군 대저면)이 1978년 부산에 편입되면서 지금은 구포동과 대저동이 모두 부산광역시가 됐다.

구포다리의 정식 명칭은 낙동장교(洛東長橋)다. 길이 1060m에 장교(長橋)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세워질 당시는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고 한다.

1970년대의 구포다리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안전성에 문제가 드러났다. 1978년부터 2.5t 이상 차량의 통행이 금지됐고 여러 차례 보수 공사가 실시됐다. 결국 2003년 9월 태풍 매미 때 쏟아진 집중폭우로 강서구 대저동 쪽 교각 1개와 상판 3개가 휩쓸려 갔다. 교각이 무너진 구포다리는 다리로서의 생명을 잃고 사용금지 조치가 취해졌다.

구포다리는 이 지역 주민의 애환이 담겨 있는 곳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구포는 마산, 창원, 김해에서 오는 모든 물자들이 한데 모이던 집산지였다. 사람도 이 다리를 거쳐야 했다. 주민 박원영씨는 “진주, 마산, 김해 쪽에서 처녀총각들이 일자리를 찾아 털털털 소리 나는 완행버스 타고 이 다리를 건너오면서 부모님 생각에 엉엉 울었던 눈물의 다리인기라”라고 말했다. 

1930년대 일제가 구포다리를 세울 때는 서부 경남의 풍부한 물자를 부산으로 실어와서 부산항을 통해 일본 본토로 운송해 가려는 목적이 컸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구포다리가 있던 자리를 나룻배가 오가면서 물자를 수송했다. 혹시 태풍이나 홍수로 인해서 강물이 불어나기라도 하면 나룻배를 이용하는 것마저도 불가능했다.

“일흔한 살 나이 고이 간직하여
칠백리 낙동강 끝자락 움켜쥐고 
파란 물결에 다리 담그고
오직 그 자리 지키고 서서
길고 장엄한 너의 모습 볼수록 즐겁다
길고 장엄한 너의 모습 볼수록 아름답다”   

                                     권성해 시

 

당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구포 사람과 서쪽의 김해 사람들 은 다리 건설을 두고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생계를 위해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힘들게 오가야 했던 김해 사람들은 다리 건설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하지만 구포 사람들은 완강히 반대했다. 다리가 세워지면 물자들이 구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산항으로 빠져나갈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다리를 건설할 때도 다리 건설 비용 부담을 놓고 알력다툼이 벌어져 구포 사람들은 건설비용을 한 푼도 부담하지 않았다.

 

 

다리 위에 있는 조명의 전기료 문제를 놓고 두 지역 청년들 간에 다툼이 빚어지기도 했다.  서로가 전기료를 부담하지 못 하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구포와 김해 사람들이 줄다리기를 해서 지는 쪽이 전기료를 부담하기로 했다. 당시 1㎞가 넘는 다리 위에 굵은 밧줄이 놓여졌다고 한다. 시합 결과 구포 쪽이 이겨서 김해가 전기료를 부담하기로 했다. 하지만 줄다리기에 진 것에 격분한 김해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다리 위 조명을 산산조각 내버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구포다리가 일제 때와는 거꾸로 부산에서 경남 쪽으로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교통로 역할을 했다.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해 유엔군은 부산항에 군수물자를 쏟아부었고 부산항에서 하역한 물자를 싣고 중무장한 트럭과 탱크들이 구포다리를 쉴 새 없이 오갔다. 왜관전투가 한창일 때는 낙동강을 따라 피아식별이 불가능한 시체가 떠내려오자 구포다리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무차별 확인사살 했다는 가슴 아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구포다리 일대의 근래 모습. 왼쪽이 구포 철교, 가운데가 구포다리, 오른쪽이 1993년 추가 개통한 구포대교  

 

이미 다리 철거가 진행되고 있지만 향토사학자와 지역 주민들은 구포다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데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낙동문화원 백이성(61) 원장은 “보존가치가 큰 문화재인 만큼 후손에게 남겨줘야 할 텐데 막무가내로 철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리를 해체할 것이란 말이 나왔을 때 ‘지하철 구포역 쪽 교각 3개라도 남겨서 근대 역사문화재로 보존해야 한다’고 여러 번 건의했는데 다 묵살당했다”고 말했다.
백 원장은 구포다리를 다시 세울 수 없게 된 원인으로 새로 건설된 구포철교를 문제 삼기도 한다. 구포철교는 구포다리 북쪽 30m 위에 세워진 부산지하철 3호선이 지나는 다리다. 백 원장은 “2005년 지하철 다리를 구포다리 바로 옆에 건설하는 바람에 물이 내려올 때 교각을 휘감아 치면서 다리 아래를 갉아먹게 됐다”며 “부산시에서 구포다리가 추가적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겁을 먹어서 새로 놓은 구포대교에는 교각 아래쪽에 돌덩이를 쌓아서 보강을 해뒀다”라고 말했다. 실제 1993년 준공된 구포대교 낙동강 서안 쪽 교각에는 교각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회색 돌덩이들이 교각을 둥글게 감고 있었다.

백 원장과 구포다리를 관할하는 부산시 북구는 구포다리 인근에 있는 지하철 구포역에 다리 모형이라도 남겨서 역사적 의미를 후손에게 보여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설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부산시에서는 예산반영 등의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구포다리를 건너 김해에서 부산으로 시집왔다는 한 할머니는 구포다리에 대한 추억을 묻는 질문에 “모르겠소, 기억도 세월따라 사라지는 거지 뭐”라고 말했다.

부산 = 이동훈 기자 flatron2@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