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비에 밀가루·식용유 매출 급증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새끼제비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 정일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에서
- 정일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 안도현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소나무껍질)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무·새우)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음식 시(詩)의 걸작 ‘국수’에도 가족의 훈훈한 체온과 숨결이 넘친다. 어머니가 동치미 국물을 뜨러 가고, 부엌에서 국수틀로 국수를 뽑고, 냉면을 사발에 말아 내오자 겨울밤 따끈한 아랫목에서 받아들고 찬미한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고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식초)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아랫목)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적경(寂境)’은 음식에 밴 가족애(家族愛)의 절정이다. 몸 푼 며느리를 위해 늙은 홀아비 시아버지가 없는 시어머니 대신 산국을 끓인다. ‘신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오는 아츰/ 나어린 안해는 첫아들을 낳었다// 인가(人家) 멀은 산중(山中)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는다// 컴컴한 부엌에서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올여름엔 비가 유난히도 질기게 왔다. 서울만 해도 8월 중순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퍼부었다. 그렇게 비 오는 여름날 어둑한 오후, 괜히 입이 궁금할 때면 저마다 비슷하게 떠올리는 기억이 있다.
하굣길에 잔뜩 젖어 집에 오면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힌 뒤 군불을 살짝 때 보송보송한 아랫목에 몸을 묻게 했다. 함석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아스라이 잦아들며 마악 잠에 빠지려는데 기름내가 코끝을 간질인다. 뭔가 지글거리는 소리가 빗소리 같기도 하다. 어머니가 부침개를 지지고 계셨다. 장마철 주전부리로는 부추전, 김치전, 장떡이 만만했고 호박전, 감자부침도 맞춤이었다. 어머니가 돼지비계나 콩기름 두른 번철(燔鐵)에 부쳐내기 무섭게 자식들 차지였다.
장마 뒤로도 게릴라성 호우라는 게 하고한 날 쏟아지면서 부침개 지져먹는 재료들이 부쩍 잘 팔렸다고 한다. 한 대형 할인점에선 작년 여름보다 식용유는 56%, 밀가루는 33%나 매출이 늘었다. 기상학자는 궂은 날엔 냄새들이 저기압에 갇혀 맴돌기 때문에 부침개 지지는 냄새가 유난히 고소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영양학자는 옛 어른의 삶의 지혜를 본다. 체온이 떨어져 차고 물기 많은 음식을 멀리하게 되는 장마철엔 고소한 기름냄새가 식욕을 자극하고 제철 채소를 섭취할 수 있는 부침개가 제격이라고 한다.
부침개 맛은 그런 과학적 인식을 초월한다. 거기엔 어김없이 어머니에 대한 옛 기억이 조건반사처럼 엮여 있다. 그 시절 어머니들이 파, 부추, 호박을 뒤란의 텃밭에서 따왔듯, 오늘 젊은 어머니들은 냉장고 속 자투리 채소와 신김치로 전을 부친다. 정취 어린 옛것이 맥없이 단절되고 사라져버리는 세상에서 드물게 신통한 일이다. 음식은 모성이고 모성은 우리네 맛의 뿌리라는 걸 비오는 날 부침개에서 실감한다. 우리는 몸 깊숙이 육화(肉化)한 추억의 음식을 맛볼 때마다 그 변치 않는 어머니의 체취를 맡으며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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