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가는 해 오는 해

세칸 2007. 12. 26. 00:26

  

한양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정민교수

 

 

 

 

               가는 해 오는 해
 
                                     이덕무가 이광석에게 보낸 연하장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것이 마치 흐르는 물이 서로 이어져 그 사이에는 터럭조차도 용납될 수 없을 것만 같네. 오직 인생이 그 안에서 놀고 먹고 울부짖고 슬퍼하며 웃고 욕하면서 살아간다네. 능히 예전의 허물을 그 큰 물결에 씻어내지도 못하고, 쉼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새로운 덕을 털어내지도 못하면서, 그저 터럭만 희어지고 뺨에는 주름만 생겨나니 서글플 뿐일세. 모르겠네만, 심계 자네는 가만히 앉아 한 살을 더 먹는 것이 즐거운가? 나는 지난 세월을 끌어당겨 하나하나 따져보노라면, 후회스럽고 슬프고 놀랍고 두려운 것이 어찌 이리 많은지 모르겠네. 망연해서 사방을 둘러보면 마치 가위 눌린 꿈에서 깨어난 것만 같다네. 삼가 우리 심계를 위해 이렇게 빌어 보네. “어버이 모시고 봉양함에 다복하고, 학업도 더 진전이 있기를. 눈 속에 졸음의 까끄라기를 남김없이 말끔히 걷어내서, 매일 밤 독서는 늘 오경까지 하시게나.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물 마시고 밥 먹는 일도 막히거나 체하는 일이 없도록.” 근자에는 신기(神氣)가 자못 고달파, 먼 걸음을 할 수가 없다네. 다리 힘이 조금 길러지면 성묘를 할 수 있겠지. 그때 서로 만나보세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집안 조카뻘 되는 심계(心溪) 이광석(李光錫)에게 보낸 편지다. 이광석은 이덕무가 가장 아낀 사람이었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이광석에게 보낸 수십 통의 편지가 실려 있다. 위 편지는 그 중의 하나다. 한해가 저무는 언덕에서 지난 1년을 되돌아보고 새해의 덕담으로 건넨 연하장이다. 
 
젊은 사람은 한 살 더 먹는 것이 설레지만, 나이 든 사람은 한 살 더 먹는 것이 싫다. 흰 머리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간다. 젊어 환하던 얼굴은 푸석푸석해지고 군살에 주름만 늘어 보기도 싫다. 내가 봐도 거울 속의 사람이 자꾸 낯설다. 사진 속의 내 모습은 영영 되찾을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그러다 문득 지나온 한 해 일을 되돌아본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때 그 말을 왜 했을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걸. 당시 내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래 사람에게 왜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지? 제 허물은 못 보고 남 이야기는 왜 그렇게 떠들고 다녔을까. 그 일은 그렇게 처리하지 말았어야 했다. 새삼 얼굴이 화끈거리고 마음이 심란해진다. 악몽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망연자실하여 좀체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다.
 
여보게, 심계! 지난 번 편지에서 어버이를 위해 탕약을 다리는데 약탕관 속에서 약물이 졸아드는 소리가 자네 애간장이 졸아드는 소리처럼 들렸다고 했었지?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등잔 심지 같다고도 했었네. 새해엔 부디 우리 효자의 부모님 건강하시고, 좋은 공부 원 없이 하시길 비네. 잠도 싹 달아나서 밤마다 마을에 자네의 해맑은 독서성이 그칠 뉘 없이 울려퍼지길 바라겠네. 무척 보고 싶지만 다음 성묘 때까지 기다려야겠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게.
 
그에게 준 이덕무의 다른 편지 하나를 더 읽어 본다.
“큰 눈이 내려 유쾌하였네. 내가 망녕되이 자네 글에 대한 의혹을 풀어 보려고 감히 긴 편지를 써서 조금이나마 내 정성을 펴볼까 하니, 바라건대 자네가 잘 살펴주시게. 오늘 자네를 찾아갈 계획이었네만, 눈이 이리 오셨으니 어찌 하겠나? 내일은 어떨지 모르겠군. 긴 편지를 잔뜩 늘어놓는 것은 급히 쓸 수가 없을 듯 하이. 오늘 인편에는 기필치 못하겠네. 며칠 더 기다리심이 어떻겠는가?”
 
마음이 통하는 벗과 이런 해맑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으면 싶다. 펑펑 눈이 오신 날 아침, 멀리서 편지를 들고 온 하인을 세워 놓고 서둘러 이런 답장을 써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