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관련 자료실

[스크랩] 민중과 함께하는 건축 -하싼하티-

세칸 2006. 12. 3. 02:03

  진흙으로 만든 궁전
  (민중과 함께하는 건축)

하싼하티(Hassan Fathy)

이집트 출신으로 영국에서 건축을 공부한 세계적인 흙건축가. 자본과 관료와 기술전문가의 시각이 아니라 민중 자신의 토착적인 지혜와 창조성이 삶과 문화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건축사상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에서 자세히 전개되어 있다. 이 글은 이른바 대안적 노벨상이라고 하는 스웨덴의 바른 생활상의 1981년 수상자로서 그가 행한 연설문이다.


지금 우리에겐 새로운 방식의 지식이 필요하다. 강제적인 산업화가 우리자신이 우리의 기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아 버린 것과 같이... ...  학교에서 배우는 강제된 학문적인 지식은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떼어놓았다. 우리는 기성품으로 되어있는 해결책, 따라하기만 하면 되는 조립식의 손과 잠재력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우리는 현금경제 속에 통합되어 있다. 이 통합에 의해 우리는 현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금경제를 강요하였다. 제 3세계의 1인당 연 수입은 25~30파운드이다. 그런 수입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현금이 필요한 산업재료로 집을 짓기 위해 건축가와 건설업자를 고용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람들에게 현금경제를 강요한 결과로 내가 <경제적 불가촉천민> 이라고 부르는 계층이 생겨났다. 그들은 현금경제에 통합될 수 없고, 또 스스로 무슨 일이든 할 수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유엔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20년 전에 제 3세계에서 8억 명이 영양실조나 그 밖의 다른 경우는 제외하더라도 , 순전히 열악한 주거 때문에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나는 이 수치가 지금은 분명 10억을 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9억밖에 안 된다고 말한다.
오늘날 성행하고 있는 체제는 건축가/건설업자 체제인데 건축가가 설계를 하고 건설업자가 그에 따라 집을 지음으로써 주인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집 없는 9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낮은 비용이 드는 주거가 아니라 비용이 들지 않는 주거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기술과 과학을 돈 없는 사람들, 즉 민주의 경제에 종속시켜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의식이 있는 현대 건축가의 역할이며 우리의 커다란 책임이다. 지금까지 많은 정부나 국제기구들은 건축비와 산업화된 자재의 비용을 줄이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들은 조립식 건축 패널을 만들도록 콘크리트 진탕기와 진동기 등을 공급함으로써 제 3세계를 위한 이른바 자조체계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를 20년 동안 실험해 보고 나서 그들은 그것이 소용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연간 25파운드의 수입을 가진 사람이 시멘트나 콘크리트 같은 산업화된 건축자재를 살 수사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탕기와 진동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섞고 다지고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고 살수 있는 것, 우리의 노동 우리의 손, 우리 발 밑에 있는 것에 의존해야 한다. 해결책은 자연이 제공한다. 우리의 조상인 동굴인들은 곡식을 타작한 뒤에 흙과 뒤섞인 짚이 단단한 덩어리를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흙의 분자는 충분히 잘 엉기지 않기 때문에 안정시키는 요소가 있어야 된다. 추수기에 진흙에 섞인 짚이 사람들에게 흙벽돌, 벽을 쌓는 adobe 벽돌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지부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 원시인들은 목재나 다른 재료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항상 목재가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란, 이집트, 리비아, 튜니지에서 사람들이 해결책을 찾아내었다. 진흙벽돌은 압력은 견딜 수 있지만 장력은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벽돌을 잇대어 쌓는데 수직선을 벽에 기대어 약간 기울려 벽돌이 경사진 면 위에 있게 함으로써 지붕을 만드는 방법을 발명했다. 접착력은 벽돌의 무게를 가의 코사인으로 곱한 것을 벽돌의 면적으로 나눈 것이다. 그들은 가로 25㎝, 세로 15㎝, 두께 5㎝ 밖에 안 되는 아주 가벼운 흙벽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단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현대과학은 진흙의 물리적, 기계적 특징 등을 알려줌으로써 도움이 될 수 있고, 진흙이 습한 기후에서 오래가지 못하는 문제를 역청유상액으로 안정시킴으로써 해결하기까지 한다.
진흙벽돌을 사용하려는 사람들은 삼중주의 연주자가 되어야 한다. 챌로주자는 토양의 성질을 잘 파악하고 있는 토양기술자가 될 것이고 바이올린주자는 건축기술자가 될 것이다. 건축가는 지휘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손의 노동 외에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는 진흙벽돌을 이용해서 철근과 콘크리트와 같은 안정도를 낼 수 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예들이 있다. 볼트작업은 역사의 아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에서 내가 아는 최초의 예는 약 5천년 전인 제 3제국의 것이다. 그들은 파라볼 볼트를 홍예틀을 사용해서 아치를 세웠다. 남부 이집트의 오아시스에도 또 하나의 예가 있다. 기원 후 4세기에 기독교도들이 로마인의 박해를 받아 한 무리가 사막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발 밑의 땅 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들은 발 밑에 있는 진흙을 사용하여 모두 둥근 지붕이 있는 250개 정도의 건축물을 지었다. 이 모범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다. 전문가들은 진흙벽돌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진흙이 잘 부서지기 때문에 유지비가 천문학적인 액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건축물은 건축가와 기술자들이 연구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생각에는 어떤 계획이나 아이디어의 가치는, 그것이 민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치학이나 경제학 등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있다. 우리가 민중에게 주택을 마련해 주려 할 때 우리는 민중의 삶의 질에 대해여 생각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한방에서 스무 명이 자야할 경우에는 환기장치가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미학적인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기의 손을 가지고 일을 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만드는 것들을 모두 아름답게 만들곤 했다. 전함에조차도 그들은 아주 멋진 도안을 새겨 넣기도 했는데 그것은 사람이 목재와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는 아름다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변화는 그 영향을 나타내는 데 시간이 걸린다. 만일 우리가 6층에서 뛰어내리고 우리의 다리가 6개월 후에 부러진다면,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를 연관짓지 않을 것이므로 다리가 부러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들 중에 어떤 것은 그것이 드러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다섯 명의 가족이 5에이커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누가 트랙터와 경운기를 주어서 5에이커의 스무 배를 농사지을 수 있다면 그것을 진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열 아홉 가구의 농사를 빼앗은 것이다. 그들은 무얼 해서 먹고산단 말인가? 쟁기를 만드는 사람, 마을의 직조공, 그리고 마을 안에서 충족되던 모든 기술들을 배제 해버렸다. 트랙터는 소처럼 풀을 먹지도 않고 우유를 주지도 않고 거름도 주지 않는다. 오직 유독한 가스만 내어놓는다. 그것은 연료와 부속품을 필요로 하고 시골의 경제를 변화시킨다.
하느님은 식물과 동물세계로 둘러싸인 자연 속에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우리의 도시에는 아스팔트와 철, 알루미늄, 콘크리트밖에 없다. 우주의 방사선을 고려할 때 우리의 주위를 둘러쌀 수 있는 가장 좋은 물질은 나무이다. 가장 나쁜 것은 이로운 방사선을 차단하는 콘크리트이다. 물은 달에서 오는 우주선(宇宙線)에 영향을 받는데, 우리의 몸은 거의 물로 되어 있으므로 역시 영향을 받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이 없다. 현대인은 이런 우주적인 의식을 잃어버렸다. 프랑스의 성당은 하늘의 처녀좌가 지구에 반영된 표시를 나타내는 위치에 건립되었다. 어째서인가? 우리는 하나의 체계의 부분이다. 만일 내가 자신을 그 체계 속에 통합시키면 그 체계의 모든 요소들이 나를 도울 것이다. 내가 손가락을 베이면 내 몸의 모든 요소들이 그것을 치유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손가락이 몸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치유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여 건축가/건설업자의 체계에서 건축가-주인/집 짓는 사람의 체계로 갈 것인가? 이것은 관련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 1인당 소득이 25파운드인 사회에서는 그들이 주로 협동에 의지해서 현금경제의 밖에서 살고 있다면, 그들의 생존자체를 설명할 수가 없다. 한사람이 집 한 채를 지을 수는 없지만 열 사람이 열 채의 집을 쉽게 지을 수 있을 것이고 백 채라도 지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전통적인 협동의 방식이 우리사회에 작용하도록 허용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내가 문 밖에 나서는 순간 수 백만 가운데 하나라는 익명성 속으로 휩쓸려버리는 도시에서는 나는 협동을 할 수 없다. 우리는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지어주고 네가 나에게 집을 지어주는 새로운 이웃을 만들어야 한다.(즉 서로 똑같은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집을 짓기 위해서, 문화를 위해서,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근육을 적당히 상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에너지 낭비인가! 축구에 낭비되는 에너지를 생각해 보라. 공을 쫓고 달리고 골에 넣으면 끝나버리는.... .... 수백만의 사람들이 축구에 대해서 갖는 것과 같은 관심을 건축에 쏟게 할 수만 있다면!
증오와 파괴 대신에 우리는 사랑과 건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건설자체가 그러한 영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행동,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기본적 본성에 영향을 미친다. 고대사회에서는 하늘을 반영하는 사원건축이 있었다. 그래서 태양의 각도가 달라지면 그들은 사원을 철거하고 새로운 치수와 방위에 따라 다시 지었다. 우리는 건물을 지을 때 참고로 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현대과학, 물리학의 발견들인가?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조차도 고려에 넣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날 사막에 짓는 현대식 가옥들에 커다란 창문을 내어 그 창문 하나마다 한시간에 수천㎉ 의 열량이 들어오게 한다. 거기에는 많은 냉방장치와 많은 현금이 필요한데 현금이 다 떨어지면 그 사람들은 자신과 그 집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기술과 과학이 가난하고 돈 없는 사람들의 경제에 종속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미적인 요소를 더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더 값싸게 집을 지을수록 사람을 존경하도록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스스로 집을 지을 때 그는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건축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집을 지을 때 미적 관점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건축가가 없는 건축> 이라는 책이 있다. 나는 현재의 건축, 표준적인 건축물을 볼 때 어느 것이 건축가가 있는 건축이고 어느 것이 건축가가 없는 건축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노력을 지나치게 줄였기 때문에 현대의 가옥은 값을 지불하고 자기의 얼굴을 그리게 한 주인의 초상화 같은 것이 되었다. 우리가 부자를 위하여 설계할 때는 하나의 집을 설계해서 유럽이든 아프리카에서든 그리고 다른 어느 곳에서든 그것을 수없이 복제해 짓는다. 우리는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콘크리트는 공간의 조절이나 자재의 접합 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마을과 도시에 음악성과 화음을 도입하고 싶다. 생리학적으로 눈은 한번에 한 점 이상을 보지 못하고 이것들을 차례로 뇌에 보낸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하나 하나의 음을 차례로 듣고서 두뇌에서 멜로디를 느낀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두뇌에서 영상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아주 빠르게 일어나는 일이므로 순간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내가 방을 둘러보면 나의 눈은 선을 따라 움직인다. 그것들이 조화로우면 나는 행복하게 느낀다. 선들이 뒤죽박죽이면 나는 신경질적으로 되지만 왜 그런지는 모른다. 나는 눈도 귀처럼 고통을 느낄 줄 알아서 흉한 것을 보면 충혈이 되고 눈물이 나고 했으면 좋겠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부조화를 느낀다.
재료는 형태가 없고 중립적이다. 0.5㎥의 진흙으로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다. 파라오의 궁전들은 모두 진흙벽돌로 되어 있었다. 뉴멕시코에 인디언 시대의 것으로 진흙벽돌만으로 지어진 건축의 유형이 있다. 이란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기술을 사용했다. 나는 바람이 불어 들어오도록 차례대로 3개의 궁륭으로 덮여있는 adobe벽돌로 지은 마을, 학교를 보았다.  그 길이는 6미터나 되었다! 토양역학과 구조 등 현대과학을 장인의 솜씨와 결합시켜 그러한 궁륭을 수백만의 가옥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덥고 습한 지역에서 주름진 철판으로 된 지붕을 쓰는데, 현금으로 값을 지불하고도 열이 차단되지 않는 것이다. 한번은 이집트의 모든 건축가와 기술자들에게 농촌주택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도록 청한 일이 있다. 카이로에 있는 건축연구센터의 마당에 모형건물이 세워졌다. 완전히 조립식인 초현대적인 것도 있었고 진흙벽돌로 된 것도 있었다. 4월에 조립식 건물의 내부의 온도는 진흙벽돌의  온도보다 섭씨 7도 높았다. 진흙벽돌집이 내부온도는 24시간 동안에 2℃이상 변하지 않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온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초현대식 콘크리트로 된 모형건물에서는 아침에 한시간 동안과 저녁의 한시간 동안 말고는 그 온도의 범위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이 현대적 건물은 현대물리학, 기체역학, 사회학, 사회심리학, 생리학 등등의 발견을 무시한 것이다. 현대적으로 되고자 한다면 이 모든 과학들을 고려해야 한다. 건축에서는 인간과학이 가장 중요하다.
하느님은 단지 현대적이 되기 위해서 코를 입 위에 두었다가 목뒤에 두었다가 하면서 얼굴의 설계를 바꾸지는 않았다. 하느님이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는 천사들에게 아담에게 절을 하라고 했다. 모두들 절을 하였는데 하느님이 콘크리트로 인간을 만들기를 원했던 사탄만이 절을 하지 않았다!!!

 
흙건축의 역사


신근식(CRA-Terre DPEA)


지금도 전 세계 인구의 30%, 약 15억의 인구가 흙집에 살고 있다. 개발도상국에만 한정시켜서 본다면 50%이상, 과반수의 농촌인구와 약20%의 도시인구가 아직도 흙으로 만든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수치상의 통계는 이미 여러 가지의 조사에 의해서 증명되어 왔고 인류의 문명속으로 흙집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페루의 60%의 건축물이 흙벽돌과 함께 담틀공법으로 되어있고 르완다의 수도인 Kigali에는 38%의 주택이 흙으로 지어져있다. 인도에서는 1971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72.2%의 주택이 흙으로 지어져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약 6천 7백만 채의 주택에 3억7천5백만명이 살고 있음을 말한다. 아프리카대륙에서는 대부분의 시골뿐만 아니라 도심의 주거까지도 흙으로 지어져 있다. 이곳에는 오래 전부터 언어의 다양성만큼 여러 가지의 세련되고 다양한 흙건축 축조방식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서아프리카에는 banco, 북부아프리카와 이집트에는 thobe라는 방식으로, 그리고 남동부 아프리카는 daga, 모로코에는 leuh라는 축조방식 등이 있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곡식창고에서부터 나이지리아의 지방의 강변과 모로코의 남부지방에 있는 궁전들, 그리고 카메룬의 Mousgoum족과 Benin의 Somba족의 성벽과 요새들 그리고 말리의 모스크와 도심형 주거 등을 통해서 우리는 주변환경에 가장 적절히 그리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온 흙건축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흙을 이용한 축조법들은 중동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란에서는 페르시아시대의 암굴주거를 통해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남예멘과 북예멘의 여러 도시(Bam, Yard, Seojane, Tabriz 등)에서 흙벽돌로 된 궁륭과 돔 축조법 등을 통해 또 다른 흙건축기술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남예멘의 Shibam시에서는 10층 이상의 보쥬방식으로 된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하남과 상시 그리고 간수에서는 인구천만이상의 도시가 두터운 황토층을 파서 암굴주거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내몽고의 Hebei지역과 Jilin에서는 절반이상의 농촌주택이 심벽과 흙벽돌 그리고 담틀공법으로 지어졌다. 동북부지방에서는 장방형의 주택들이 계단식으로 같은 방식으로 지어졌었다. Zhejiang지역에서는 대규모의 주택들뿐만 아니라 담틀방식으로 된 복층집도 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의 고원지대에서는 이러한 축조법들이 1950년대까지 그대로 존속되어 왔었다. 유럽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농촌주택을 중심으로 흙을 이용한 축조법들을 전승시켜 왔다. 스웨덴, 덴마크, 독일, 스페인, 포르투칼, 프랑스의 거의 모든 나라의 농촌에서 담틀방식과 심벽 그리고 흙벽돌로 된 주택들을 볼 수가 있다. 특히 18세기 프랑스의 Francois Cointeraux가 포도 짜는 장치에서 착안하여 압축흙벽돌을 만드는 기계를 고안해내고 그의 저서“nouveau pise"를 통해 담틀공법의 다양한 축조법들을 소개하여 유럽전체의 흙건축 기술을 한 단계 올려놓았고 흙건축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었다. 하지만 1950년대까지 다시 잊혀진 기술이 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 후 흙을 건축적인 재료로서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연구와 개발을 시작하여 지금은 다른 건축소재들과 충분히 경쟁할 만한 수준으로 발전되어있다.
미국의 남동부지방에서는 흙벽돌을 이용한 환상적인 건축들을 볼 수가 있는데 1980년의 조사에 따르면 약 17만 6천 여채의 흙집(전체 흙집의 약 97%)이 이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캘리포니아의 뉴멕시코 지방에 있는 48개의(1981년) 흙벽돌공장에서 매년 약 4백만장의 흙벽돌을 생산하고 있고 매년 30%씩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 이 곳에는 Santape라는 흙건축 마을은 우리에게 흙을 이용한 전통적인 축조법이 현대까지 계승되어온 과정을 보여준다. 아도브로 만들어진 도서관이나 행정관서 그리고 현대적인 주택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담틀공법을 이용한 현대적인 새로운 시도들도 계속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 또한 흙건축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많은 전통과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페루의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많은 지역에서 문명의 발상과 함께 수많은 도시들이 흙벽돌과 담틀공법으로 지어졌다. 이러한 기술들은 중미의 멕시코에서도 발견되고 각기 지역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훌륭한 역사적 전통은 현대에서 다시 화려하게 계승되듯이 이곳에서의 흙건축의 연구는 매우 놀라운 수준으로 주택뿐만 아니라 상업건물들과 공공건물까지 그 용도가 확대되고 있다.
70년대 이후 에너지절감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흙이란 소재에 대해 많은 연구가 선진공업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흙벽돌과 담틀방식이 이미 건축법으로 규정되어있고 여러 지역과 국가적 차원에서 축조방법들을 개발하고 있다. 특히 흙의 단열효과를 증진시키기 위한 연구에 수 백만 달러의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우선적으로 흙의 물성과 건축소재적인 측면에서 과학적인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어오고 있고 여기에 매년 약 2천 4백만 프랑의 연구비가 투자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와 개발을 토대로 1982년 Lyon근처의 lledabeau지역에 Domaine de la terre라는 현대적인 흙건축 마을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스위스와 벨기에와의 대학을 중심으로 한 공동연구도 진행되고 있고 체계적인 교육기관(CRA-Terre)도 현재 운영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는 단순한 주택뿐만 아니라 시청사, 법원, 도서관 등 공공시설들을 토속적인 심벽 구조체를 발전시켜 지역적인 환경에 조화를 이루고 있고, 가장 시급한 문제인 주택보급 문제에도 흙건축이 매우 효과적인 대안으로 적용되고 있다. 지금도 대규모의 주거단지를 압축흙벽돌을 이용하여 경제적으로 짓고 있다. (주택 1채를 짓는데 평균 80~100$) 농촌환경의 경우에는 흙건축이 도심보다 더욱더 경제적이고 활발하게 적용될 수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또한 지역주의건축이라는 관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페루의 Correo신문의 1978년 1월 30일자를 보면 “흙벽돌은 페루건축의 파수병이 될 것이다.”라고 이미 천명을 하고 체계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흙벽돌을 이용한 다양한 건축물이 지어지고 있다...
흙은 앞으로 가장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건축적인 재료임에는 분명하다. 문명의 발상과 함께 우리 곁에서 주거를 위한 중요한 소재로서 존재하여왔고 그 소임을 지금도 묵묵히 해내고 있다. 다만 흙의 무한한 잠재력을 무시하고 철과 콘크리트만이 진보와 발전의 대명사라고 생각하는 섣부른 판단을 버리고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연구와 기술 개발을 한다면 흙은 다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다. 흙건축은 더 이상 가능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실제하고 있고 항상 우리의 따스한 손길과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

자료출처: daum cafe - archifamily 의 자료실에서 퍼온 글입니다

 

출처 : 전통과 생명의 美 흙집세상
글쓴이 : 권오혁 원글보기
메모 :